열두 겹의 자정

김경후 · Poem
1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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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시인선' 19권. 시인 김경후가 돌아왔다.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2001년 첫 시집을 펴낸 이후 햇수로 11년 만이다.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독특한 시제의 문장을 가진 첫 시집에 이어 이번에는 <열두 겹의 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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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시인의 말 1부 토르소 세 다리 의자 위에서 북 치는 여자 동그라미 해 질 녘의 슬리퍼 프레스코 상어와 한 컷 동물원 데이트 목탄 소묘, 연인 장마 열쇠 바늘의 사실 바람의 풍장 쓰르라미가 묻고 쓰르라미가 답하는 하루 커플 벙어리장갑 고딕식 곁 달궈진 프라이팬 위의 자정 손톱의 블랙유머 농담 예스터데이 붕대 밤의 카페 타인의 타액으로 만든 나의 풍경 자라나는 제로 모래의 악보 2부 코르크 지우개 그믐 천막 교실 머리카락 해바라기 시간 환절기 샌드백 검은 봉지를 들고 코너 모서리에 못 단풍 낙엽 가두다 잘 듣는 약 크리스마스 11 구덩이 납거미 금 여백의 연기력 에칭 모래의 시 여덟번째 해바라기와 여덟번째 기억 사이 문자 3부 아름다운 책 두 시 구 분 육 초의 상상 떠돌이 베개 변두리 나는 어느 벽 뒤에 바다코끼리 머리뼈 첫눈 슬픈 톱니바퀴?정오부터 자정까지 안개 공황 얼룩 안개 악몽 바퀴 너무 멀리 왔네 비밀과 턱 안개 무대 회전문을 위한 회문(回文) 뱀을 따라간 길 실 끝 해설 | 빈 세상에 뜬 노래 | 이소연(문학평론가)

Description

기묘한 침묵과 슬픔, 그리고 비탄 기억과 망각이 포개진 ‘열두 겹의 자정’ 1. 시인 김경후가 돌아왔다.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2001년 첫 시집을 펴낸 이후 햇수로 11년 만이다.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독특한 시제의 문장을 가진 첫 시집에 이어 이번에는 『열두 겹의 자정』이다. 흘러가버리는 시간에 부피가 생겼다. 읽는 이를 고요히 장악하는 ‘닫힘’과 ‘침묵’의 언어는 여전하다. “아귀의 심장보다 어둡고/ 바늘의 혓바닥보다 딱딱한/ 늑대 발바닥 냄새가 나는 이미지들,/ 질식의 리듬”(「모래의 시」)을 짓는 67편의 시. “부서지는 시”들에서 뚝뚝 묻어나는 어둠은 더욱 농밀해졌다. 시인의 손에 이끌려 그 어둠 속에 발을 들이면 어느새 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독특한 시간성 때문이다. “시간은 셀 수 없는 미래들을 향해 영원히 갈라지지요”라는 보르헤스의 말은, 적어도 그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바깥에서 안으로 끝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김경후 월드. 그곳에서 시간은 고이고 또 고여 겹겹이 쌓인다. 2. 또 밤인가요? 또 언제나 밤이지요 혼자 씨익 웃으며 혼자 몸을 쓸어내립니다 ―「쓰르라미가 묻고 쓰르라미가 답하는 하루」 부분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겹겹의 시간, “언제나 밤” 속에는 무엇이 숨 쉬고 있는가. 발이 푹푹 빠지는 밤, 서로 대답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만난다 대합 껍질 속에 넣어둔 내 혀의 무늬는 어떻게 변했을까 너덜너덜해진 침묵을 기워대는 것도 이제 그만 침묵조차 불을 끄고 방을 나간다 텅 빈 어항을 껴안고 홀로 서 있는 밤 ―「붕대」 부분 닫힌 내 안에 꽉 막힌 목구멍에 이제 그곳에 빛나는 건 부서진 나를 짚고 다니던 부서진 너의 하얀 지팡이 내 안엔 악몽의 깃털들만 날리는 열두 개의 자정뿐 ―「그믐」 부분 ‘언제나 밤’, 사랑과 좌절,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 서서 중얼거린다. “어둡게 피 흘리는 기억들”, 부디 “내 혀에서 떨어져 가루로 흩어져라”. 이제 없는 ‘너’를 비롯해 상실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일은 괴롭다. 잊어본다. 잊었고, 다 지웠다 생각한다. 그러면 “모든 기억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지웠다는 기억”은 어찌해야 하는가.(「지우개」) 괴로움은 사라졌나. 나는 진정, 잊기를 원하는가. 김경후의 이번 시집은 그러므로 “잊기의/ 기억”(「토르소」)에 바쳐졌다 할 수 있겠다. 오래된 건지 버려진 건지 모를 옷과 가방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세탁기에 해어진 너의 명함과 동전지갑, 그건 더욱더 아닌, 너의 밤색 머리카락과 새치까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게 아니어도 이미 그런, 나는, 비어 있는 수족관의 오래된 물때만 손가락으로 비비고 있다 ―「환절기」 부분 문학평론가 이소연은 해설에서 화자가 “한결같이 지켜내려고 하는 것은 잃어버린 대상이라기보다,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자신의 결심이다. 기억하기, 망각에 맞서기, 그것이야말로 상실로 만연한 세계에 그가 맞서는 방식”이라고 역설한다. “이미 그런, 나는” 어두워진 것과 밝아질 것의 경계 시간인 ‘자정’ 에 머무른 채 한 겹 한 겹, ‘잊기의 기억’을 쌓아간다. 3. 김경후의 시는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발견하게 하고 이를 또다시 상실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환희와 슬픔을 한 자리에 모으는 역할을 한다.” 그의 시는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을 빼앗긴 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끝까지 따라가는 순례의 여정인 것만 같다.”(해설 「빈 세상에 뜬 노래」에서) 이는 상실한 것,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그만의 애도의 방식일 터이다. “곰팡이 슬어도 썩지 못하는/ 어제, 예스터데이”(「농담 예스터데이」)에 대한 애도. “매의/ 피로/ 만든/ 양초/ 타/ 올라/ 허공/ 이나/ 찢어/ 발”겨도, “뭉개/ 지고/ 짓/ 이겨/ 져도/ 나는/ 매의/ 피/ 만/을/ 흘린다”(「고딕식」)고 선언하는 그의 양손에 들린 비탄과 슬픔은 어느새 절실함과 숭고함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