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 Novel
2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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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이곳의 '오늘들'을 기록하는 작가 정이현의 세번째 소설집. 사랑은 발명된 것이라 냉소하며 실리를 추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첫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2003), 거대한 사건에 가려진 개인의 고통과 상실을 그려낸 제51회 현대문학상 수상작 '삼풍백화점'이 수록된 <오늘의 거짓말>(2007)을 출간한 이후, 소설집으로는 9년 만이다. 그 사이사이 정이현은 남성 중심적 가치관의 부조리를 비틀어 보여주며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신드롬을 일으켰던 <달콤한 나의 도시>(2006), 알랭 드 보통과 공동 작업한 (2012) 등 동시대인의 삶과 사랑을 증언하는 여러 장편과 산문집을 꾸준히 내왔고, 팟캐스트(낭만서점)를 진행하거나 가수 요조와 함께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시도하는 등 늘 '오늘'에 충실하려 노력해왔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2013년 겨울부터 발표한 소설들 가운데 일곱 편을 추려 묶은 책이다. 2000년대 중반 정이현 소설에 따라붙던 "도발적이고 발칙하며, 감각적이고 치밀하다"는 수식의 절반은 지금 대체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장했고, 시대는 달라졌으며, 이에 발맞춰 정이현도 변화했다. 그의 문장은 여전히 감각적이고 치밀하지만, 정이현은 이제 2010년대와 동세대 사람들에게서 톡 쏘는 '쿨함' 대신 '모멸'과 '관성'이라는 서늘한 무심함을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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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아무것도 아닌 것 우리 안의 천사 영영, 여름 밤의 대관람차 서랍 속의 집 안나 해설_ 공허와 함께 안에서 밀고 가기 | 백지은

Description

“우리는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갈 것이다” 미소 없이 상냥하고 서늘하게 예의 바른 위선의 세계, 삶에 질기게 엮인 이토록 멋없는 생활들에 대하여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을 거쳐, 상냥한 폭력의 ‘시대’에 이르는 정이현 단편의 계보 우리와 이곳의 ‘오늘들’을 기록하는 작가 정이현이 세번째 소설집을 선보인다. 사랑은 발명된 것이라 냉소하며 실리를 추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첫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2003), 거대한 사건에 가려진 개인의 고통과 상실을 그려낸 제51회 현대문학상 수상작 「삼풍백화점」이 수록된 『오늘의 거짓말』(2007)을 출간한 이후, 소설집으로는 9년 만이다. 그 사이사이 정이현은 남성 중심적 가치관의 부조리를 비틀어 보여주며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신드롬을 일으켰던 『달콤한 나의 도시』(2006), 알랭 드 보통과 공동 작업한 『사랑의 기초―연인들』(2012) 등 동시대인의 삶과 사랑을 증언하는 여러 장편과 산문집을 꾸준히 내왔고, 팟캐스트(낭만서점)를 진행하거나 가수 요조와 함께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시도하는 등 늘 ‘오늘’에 충실하려 노력해왔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2013년 겨울부터 발표한 소설들 가운데 일곱 편을 추려 묶은 책이다. 2000년대 중반 정이현 소설에 따라붙던 ‘도발적이고 발칙하며, 감각적이고 치밀하다”는 수식의 절반은 지금 대체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장했고, 시대는 달라졌으며, 이에 발맞춰 정이현도 변화했다. 그의 문장은 여전히 감각적이고 치밀하지만, 정이현은 이제 2010년대와 동세대 사람들에게서 톡 쏘는 ‘쿨함’ 대신 ‘모멸’과 ‘관성’이라는 서늘한 무심함을 읽어낸다. *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_「작가의 말」에서 별 악의도 열의도 없이 ‘모멸 권하는 사회’ 입주자 전용 엘리베이터가 여섯 대 운행되고 있지만 직원들은 탈 수 없었다. 입주자들과 마주치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언젠가 본부장이 전체 회의에서 그것을 재차 강조했을 때 나는 불쾌감이란 단어를 혐오감으로 대체해보았다.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에서 인간 개인의 내면 그리고 사회에는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심연이 있다. ―김찬호, 『모멸감』(문학과지성사, 2014)에서 정이현이 포착한 ‘오늘’은 친절한 표정으로 무심하게 모멸감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다. 이 ‘세련된 폭력’은 조금씩 모습을 바꿔가며 소설에 등장한다. “인격을 비하하거나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취한 적은 없”지만 오히려 “타인에게 아무 태도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태도를 완성시”키고 “번번이 타인을 불쾌하게 만드”는 원로 정치인 ‘박’(「밤의 대관람차」)이나, 늘 “돼지”라고 괴롭힘을 당해왔으나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놀림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리에에게 말 한마디 걸어오지 않는 K국의 아이들(「영영, 여름」)처럼, 세대부터 국적까지 상이한 이들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심코 일상적인 모멸을 가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에도 ‘상냥한 폭력’은 빈번히 발생한다. 사랑은 때로 상대가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한다.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에서 아버지는 몇 년간 함께 산 연인 ‘미스조’를 동네 밖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소개시킨 적이 없다. 「밤의 대관람차」에서 이별을 고하던 남자의 과한 눈물은 어쩌면 어린 연인을 “완벽하게 설득시키고 꼼짝없이 이별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위선이었을 것이다.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다. 미숙아를 갓 낳은 고등학생 딸 ‘보미’가 “의무와 책임에 대해, 매일 하는 일의 귀중함에 대해 배워가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엄마 ‘지원’ 자신은 보미가 낳은 아기를 무책임하게 방치한다. 그 아기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설레듯 가슴이 뛰는 지원은 무섭도록 보미를 사랑하는 게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딸이 원하는 방식은 아닌 듯하다(「아무것도 아닌 것」). 한편, 「안나」의 ‘경’은 지속적으로(그러나 역시 자각하지 못한 채)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고연봉자 남편을 만나 절실할 필요 없이 살아가는 사십대 전업주부인 그녀에게는 영어유치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입을 열지 않는 아이가 가장 큰 근심거리다. 과거에 댄스 동호회를 함께하다 학부모와 영어 유치원 보조 교사로 다시 만난 ‘안나’를 잠시 의지하지만, 경이 안나와 친하게 지낸 이유는 “현실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신경 쓸 필요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안나와 만날 때면 경은 어울리는 옷과 가방을 매치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이 가자고 제안한 식당이 유행에 뒤처지는 곳이거나 맛이 없는 곳이라 상대가 실망할까 봐 마음 쓰지 않아도 되었다.” 항상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안나는 경에게 ‘좋은’ 사람이라기보다 ‘쉬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과거 안나가 댄스 동호회에서 빛을 발할 적에도 “박수를 받을 일이 나이뿐이라” “안됐다”며, 자신의 열등감을 비틀어 상대를 멸시하기 바빴던 경은 ‘상냥한 폭력’의 살아 있는 표본이라 할 만하다. 동시에, 경은 그간 정이현의 소설에서 빈번하게 등장해온 속물형 인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이현의 지난 소설집들에서 등장하는 위악적인 인물형이 왜곡된 세상을 보여주는 거울로써 기능했다면, 이번 소설집에서의 ‘비틀린’ 사람들은 대개 위악적이기보다 위선적이다. 이 위선은 또한 “위장술”이라기보다 “호신술”에 가깝다. 그들이 드러내는 추문은 경우에 따라 나의 얼굴에 슨 녹과 닮아 있어서 통쾌하기보다 한탄을 자아내곤 한다. 그들은 다만, “최대한 극적인 일 없이 살고 싶”(백지은)을 뿐이다.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기꺼이 증언해줄 만큼의 작은 용기”라고 답할 것이다. 부부는? “대화가 없어도, 음악이 없어도, 라디오 소리가 없어도, 사랑이 없어도, 세상 모든 소리와 빛이 사그라진 곳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 청춘보다 좋은 점은? “간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잘하는 버릇은? “제삼자의 위치를 선점해버림으로써 당면한 문제에 대한 실무적 책임을 타인의 몫으로 넘겨버리”기. [……] 무서운 것도, 어색한 것도, 간절한 것도 ‘없어 보이는’, 삶에 질기게 엮인 이 멋없는 생활들, [……] 이 생활들은 아마도, “결정의 순간에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정해버리고, 전 생애에 걸쳐 그 결정을 지키며 사는 일이 자초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해야 올바를 것 같다._백지은(문학평론가) 관성이라는 진통제 이것은 커다란 도미노 게임이며, 자신들은 멋모르고 중간에 끼어 서 있는 도미노 칩이 된 것 같았다. 종내는 모두 함께, 뒷사람의 어깨에 밀려 앞 사람의 어깨를 짚고 넘어질 것이다. 스르르 포개지며 쓰러질 것이다. ―「밤의 대관람차」에서 “세상살이에 길들여진 이들”(백지은)은 드라마틱한 불행이 없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더, 더 독해져야” 한다. 이 소설집에서 독하다는 건 악하다기보다 끈질기다는 말에 가깝다. 빈번한 “조짐”과 “징조” 뒤 무언가 깨지고 들이닥친다 해도 그것은 세계 멸망 같은 완전한 파국이 아니므로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 스”치는 “유리 파편”같이 자잘한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면서(「아무것도 아닌 것」). 집 주인이 전세가를 올리겠다고 하자 삼십대 부부 ‘진’과 ‘유원’은 고민 끝에 매매가가 저렴하게 나온 다른 집을 사기로 결심한다. 직접 가보지 못했으나 같은 라인 아파트를 살펴보고서 계약을 마치는데, 입주 전날 찾아가본 새집에선 악취 풍기는 쓰레기 더미가 끝없이 실려 나가고 있다. 아파트 경비원에게 사연을 듣다 진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