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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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시간에 쫓기는 불안한 현대인에게 권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새로운 이야기 한국의 대표적 마르크스 경제학자 류동민 교수 ‘자본의 시간’에 휩쓸려 잃어버린 ‘삶의 시간’을 되찾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찰리 채플린이 치과 의료 장비처럼 생긴 기계에 앉자, 자동으로 움직이는 로봇 팔이 그의 입에 음식을 가져다 넣는다. 그러나 기계 오작동으로 그의 얼굴은 이내 난장판이 되어 버린다. 식사시간조차 줄여 노동시간을 늘리려는 산업 혁명 시대의 에피소드는 과거의 유산만은 아니다. 노동자의 화장실 이용 시간까지 기록했다는 어느 물류 센터의 사례처럼, 현대 사회에서도 노동시간에 대한 통제와 감시는 여전하다. 사회는 진보했다는데 왜 이런 일들은 계속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돈’이며, 돈이 되지 못하는 시간에는 ‘잉여’라는 딱지가 붙는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눈으로 세상만물을 분석하는 류동민 교수가 이번에 주목하는 대상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시간’이다. 우리 일상에서 시작하는 질문은 시간의 속성을 다루며 자본주의적 시간의 의미와 구조를 드러낸다. 과연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간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1.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인가 - ‘코리안 타임’에서 ‘시간관리’의 사회로 한때 우리는 ‘코리안 타임’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았다. 눈 깜짝할 새에 압축적 경제 성장을 겪으면서 ‘빨리빨리’라는 외침이 도처에서 들렸고, 지금은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해내는 ‘시간관리’가 최고의 경쟁력이다. 돈이 곧 권력으로 이어지는 곳이 자본주의 사회라면, 돈을 지배하는 ‘시간’은 자본주의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일까? 물리적으로 인간에게는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유한한 수명이 똑같이 주어진다. 현대 사회를 사는 모든 이에게 자기 계발, 경영 원리 등 시간관리 기술이 강요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똑같은 시간을 일해도 관리자의 연봉과 노동자의 연봉에 수십 배의 격차가 있는 건 왜일까? 그것은 관리자와 노동자가 가진 시간의 가치가 다르게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런 걸 보면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은 어쩌면 한정된 시간이 주어진다는 사실뿐일지도 모른다. 나인 투 식스(9 to 6) 근무, 러닝 타임 120분, 시간당 최저임금 7,530원. 이렇게 시간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우리 삶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서 돈과 권력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시간이 자본주의라는 물질적 삶의 방식과 관련된 주제라면 이에 대해 좀 더 비판적이고 심도 깊은 고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최초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 2. ‘시간’을 주인공으로 ‘마르크스 경제학’이라는 드라마를 다시 쓰다 -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시간’을 대입하여 자본주의를 해부하다 시간의 경제학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교과서 속 경제학에서 시간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나는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받고 있을까?’ ‘나는 왜 매번 시간 관리에 실패할까?’ ‘왜 출퇴근 시간은 노동시간에 포함되지 않을까?’ ‘AI에 일자리를 빼앗겨 노동시간이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리듬에 맞춰 살아가지만, 자본주의 경제는 이와 상관없이 ‘단위 시간당 노동성과’라는 틀에 가두어 우리를 평가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계획적으로 잘 관리하는 사람을 ‘프로페셔널’이라 부른다. 류동민 교수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해부학적 비판을 시도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꺼내든다. 그러고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을 넣었던 자리를 ‘시간’으로 대체하여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간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복잡다단한 개념은 시간을 매개로 우리 앞에 한결 더 가까이 다가선다. 지금의 현실에서 출발하는 문제 설정과 시간에 은유된 개념들이 오늘날 마르크스 경제학이 갖는 의미를 생생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로 가까이 내 일상에서부터 비판적 시간을 갖고 자본주의 사회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가려왔던 ‘구조’의 문제에 마침내 도달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가 공기처럼 스며든 일상에서 기억의 조각을 극한까지 찾아 나가듯, 자본주의적 삶 속에서 끊임없이 지워져 가는 시간의 자취를 추적하는 것. 《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는 그것을 통해 시간을 매개로 자본주의의 숨겨진 얼굴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3. 마르크스 경제학이 포착한 자본주의적 삶의 단편들 - 대중가요 〈싸구려 커피〉부터 소설 《편의점 인간》까지, 일상 도처에서 발견하는 경제학적 이야기 · 사례#1 맨아워 보고서 쓰느라 맨아워 쓴 사연 어느 날 ○○연구소에 맨아워(Man-Hour)라는 시간관리 제도가 생겼다. 1주일 동안 맨아워(1시간=1맨아워) 단위로 업무 내용을 보고하는 제도다. 그러다 보니 맨아워를 들여 맨아워 보고서를 써야 하는 역설이 생겼다. ‘맨아워 관리’는 업무에 포함될 수 있을까? → ‘프로페셔널의 조건’과 시간의 밀도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 ‘인정 투쟁’이라면, 성긴 시간을 빽빽하게 만드는 것은 인정 투쟁의 중요한 형식이 된다. 성과 관리는 남의 돈을 받고 일하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이 얼마나 밀도 있는지, 바꿔 말하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끊임없이 입증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되면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전도(顚倒) 현상이 종종 일어난다. 시간을 아껴서 더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 못지않게, 유의미한 일을 했음을 시간의 형식에 맞추어 드러내고 인정받는 것이다. (74쪽) · 사례#2 경제학의 눈으로 읽은 《편의점 인간》 소설 《편의점 인간》의 주인공은 18년째 편의점 점원으로 일하는 여성이다. 연애도 하지 않고 친구도 사귀지 않고 끼니조차 편의점 음식으로만 해결하며 편의점 안에 있을 때만 편안함을 느끼는 그녀는 “시급에는 건강하게 출근하는 것까지 포함된 거야.”라고 말한다. → 삶의 시간 vs. 자본의 시간 지은이가 현실 비판을 의도했다면 자본의 관점을 내면화한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겠으나, 어쩌면 그저 건실한 생활인의 자세를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자기 일에 성실하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바람직한 덕목이다. 그러나 강제로 제한된 영역 안에서의 성실은 굴종의 미화일 수도 있으며 나쁜 구조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실은 바로 여기에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먹고사는 노동자가 맞닥뜨리게 되는 양면성, 즉 ‘실존적 성실’이라는 개인적 삶의 문제와 ‘권리는 힘을 통해서만 확정된다.’라는 사회적 삶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103쪽) · 사례#3 인공지능에 일자리를 빼앗겨 노동시간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공지능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기본소득은, 보수 세력으로부터는 사회주의적 발상으로 여겨지지만, 막상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는 개량주의적 정책이라 비판받는다. →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 마르크스의 가장 중요한 명제 중 하나가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것이라면, 기술적으로 노동시간이 필요 없어진 상황에서도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기득권층의 저항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적 기본소득이 소멸되더라도 유토피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 현실에서는 기본소득의 도입 그 자체부터 정치적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203쪽) · 기술 발전으로 말미암아 노동시간의 단축이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