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Description
지난 20여년간 청춘을 위로해온 ‘서른살의 필독서’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는 사랑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아주 잠깐이더군//그대가 처음/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잊는 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멀리서 웃는 그대여/산 넘어 가는 그대여//꽃이/지는 건 쉬워도/잊는 건 한참이더군/영영 한참이더군(「선운사에서」 전문) 199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한 이후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최영미 시인의 기념비적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시대를 응시하는 처절하고도 뜨거운 언어로 한국 문단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이 시집은 지금껏 50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며 또다시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내겐 축복이자 저주이며 끝내 나의 운명이 되어버린 시집을 새로이 세상에 내놓”(개정판 시인의 말)으면서 시인은 세편의 시(「지하철에서 6」 「마포 뒷골목에서」 「귀거래사(1992)」)를 덜어내고 과도한 수식어를 쳐내는 등 손톱을 다듬는 마음으로 젊은 날의 시편들을 일일이 손보았다. 간결하게 정돈된 시어들은 최소한의 언어로 간결미를 뽐내며 당대에 대한 치밀한 묘사와 비유를 더욱더 생생하게 드러낸다. 지난 이십여년간 ‘서른살의 필독서’로 청춘의 아픔과 고뇌를 다독여온 이 시집은 “어떤 싸움의 기록”(최승자, 추천사)이자 깊은 사랑의 기록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는 변했지만 “교과서가 없는 시대에 고투하는 젊은 영혼의 편력을 도시적 감수성으로 정직하게 노래”(최원식, 추천사)한 시편들이 당대를 건너온 시인의 열정과 어우러져 여전히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잔치는 끝났다/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지갑을 챙기고/마침내 그도 갔지만/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리라/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서른, 잔치는 끝났다」 전문) 지난 1980년대의 암울했던 현실을 때로는 서정적이고 때로는 도발적인 날것 그대로의 언어로 그려낸 시편들로 가득 찬 이 시집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을 간직한 채 “청춘과 운동, 사랑과 혁명 같은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자신의 구체적 삶 속에서 질퍽하게 하나로 동화시켜가는 궤적을 보여주”는 “어떤 싸움의 기록”(최승자, 추천사)이자 시대의 기록이다. 시인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자기와의 싸움”(김용택, 발문) 속에서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혁명이 진부해졌다/사랑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랑이 진부해졌다”(「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가 열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시인이 진정으로 꿈꾸는 것은 이를테면 “커피를 끓어넘치게 하고/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촛불을 춤추게 하는”(「사랑의 힘」) ‘사랑의 혁명’이다. 한편 시인은 조탁된 언어로 깊고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제 “다듬을수록 날이 서던 상처”(「다시 찾은 봄」)들을 떠나보내고 “생각이 미쳐 시가 되고 시가 미쳐 사랑이 될 때까지”(「생각이 미쳐 시가 되고……」)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되새기며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딛고 일어서 “말갛게 돋아나는 장미빛 투명으로/내일을 시작하리라”(「대청소」)는 다짐을 가다듬는다. 그것이 곧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끝끝내, 누구의 무엇도 아니었던”(「나의 대학」)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는 사랑 아니겠는가. 이는 축복이 아니라 도리어 재앙이었을지도 모를 청춘의 자유 속에서 진짜로 싸워본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삶은 여전히 처절한 싸움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과하는 젊은 영혼은 이 시집 안에 아직 고스란히 살아 있다.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가을에는」 부분) 그간 많은 작품에서 새로운 언어로 ‘서른’을 수식하고 정의 내리려고 하지만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주는 상징성과 강렬함을 능가할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지금 이 시대의 서른을 살아내는 청춘에게, 젊은 시절의 자기 삶의 열정을 치열하게 뒤돌아볼 줄 아는 당신에게, 여전히 서른을 빛나게 할 이 시집을 선사한다. 손톱을 다듬은 듯 정돈된 시들을 훑어보며 나는 안도했다. 이제 눈을 감아도 되겠네. 마흔이 지나 전업시인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깨닫고 많이 후회했다. 내가 왜 시인이 되었던고. 날마다 출퇴근하는 직장인들, 다달이 월급봉투를 받는 이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처럼 사는 데 서툴고 인간관계에 어두운 사람이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건 첫 시집 덕이다. (…) 내겐 축복이자 저주이며 끝내 나의 운명이 되어버린 시집을 새로이 세상에 내놓는다. 21년이 지나 이제야 보인다. 내가 왜 그 말을 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내가 왜 헤매었는지. 나 혼자 떠돈 게 아니었다. 나 혼자 끄적인 시가 아니었다.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새겨진 언어의 파편들은 시대의 기록이다. 함께 겪은 그대들의 열망과 좌절이, 변화한 사회에 안착하지 못한 세대의 파산한 꿈이 내 몸을 빌려 나온 것이다.(‘개정판 시인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