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머니즘의 미학

김은령 · Humanities
2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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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 환경, 바이오테크놀로지의 혁신 등이 추동한 미적 감수성과 그 실천의 변화상을 인문학적 시각으로 고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예술 작품의 아우라 상실을 넘어, 예술과 기술이 혼융되고 계몽주의 이래 유지되어 온 인간의 경계마저 희미해지는 ‘포스트휴머니즘’적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화폭은 모니터로, 물감은 픽셀 속 디지털 정보로 대체되는가했더니, 어느새 인간 신체 자체를 예술적 실천의 장(場)으로 삼는 데 이르렀다. 그렇다면 미적.예술적 감수성을 고찰하는 인문학(미학)은 지금 어떤 변용을 겪고 있을까? 그 한계가 노정되는 지점은 어디일까? 현실 변화에 발맞춘 인문학의 진화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또 가능한 것일까? 백남준 등의 미디어 아트부터 유전자 조작 기술을 활용한 바이오 아트, 가상현실을 제공하는 3D 영화와 컴퓨터 게임 등의 작품들을 사례로 살피며,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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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머리말 1장 _ 디지털 미학과 감수성의 변화 2장 _ 미디어 아트 3장 _ 인터랙티브 아트 4장 _ 인터넷 아트: 사이버 시대의 예술 5장 _ 예술과 과학기술의 융합 그리고 인간: 바이오 아트의 가능성과 문제점 6장 _ 프로테시스 기술과 여성의 ‘몸’ 퍼포먼스 7장 _ 영화 속에서 테크놀로지 찾기 8장 _ 컴퓨터 게임과 가상현실: 실재와 가상 사이 9장 _ 예술과 기술의 융합 그리고 그 이상: 진화하는 인문학 참고문헌 찾아보기

Description

화폭에서 전자 공간으로, 그리고 몸으로!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개되는 미적 감수성의 진화!! 야광토끼가 있을까?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다 있냐고 반문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야광토끼는 있다! 게다가 그것은 살아 있는 ‘바이오 아트’ 작품이기도 하다. 브라질 출신 예술가 에두아르도 카츠(Eduardo Kac)가 해파리에서 추출한 녹색 형광 단백질(GFP)를 이식해 만들어 낸 GFP-토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122쪽 참조). 현대 예술의 첨단 조류에 특별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형광 물질을 이식받은 살아 있는 토끼가 예술 작품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자기 몸에 직접 외과적 시술을 통한 조작을 가해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131쪽 이하 참조)가 있다면 어떨까? 이쯤이면 거의 섬뜩하게(uncanny) 느껴지지 않을까? 이 책 『포스트휴머니즘의 미학』은 기술 혁신의 현란한 질주에 올라타고서 전통적인 미적 감수성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영역에까지 도달한 예술이, 미학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인문학에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지를 고찰하고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의 미학』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예술 작품의 아우라 상실을 넘어, 예술과 기술이 혼융되고 계몽주의 이래 유지되어 온 인간의 경계마저 희미해지는 ‘포스트휴머니즘’ 시대의 초입이다. 미디어 아트의 등장으로 화폭은 모니터로, 물감은 픽셀 속 디지털 정보로 대체되는가 했더니, 어느새 생명체의 신체 자체가 예술적 실천의 장(場)으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적.예술적 감수성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인 미학은, 그리고 그 토대를 이루는 인문학은 지금 어떤 한계를 노정하고 있으며 또 어떤 변용을 겪고 있을까? 변화한 현실에 발맞춘 인문학의 진화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또 가능한 것일까? 책의 서두에서 마셜 매클루언(맥루헌), 빌렘 플루서,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등 대표적 이론가들의 논의를 먼저 검토하면서 문제의식을 정련한 저자는, 미디어 아트와 인터넷 아트, 인터랙티브 아트, 바이오 아트, 가상현실 체험을 제공하는 3D 영화와 컴퓨터 게임 등의 작품들을 사례로 살피며 이러한 질문들을 다룬다. 숭고, 미적 감수성의 변용 위에서 언급한 ‘언캐니’(uncanny)라는 감각은 프로이트의 개념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것, 친근한 것, 낯익은 것과 대비되는, 그러나 그와 분리될 수도 없는, 공포감과도 비슷한(그러나 미묘하게 다른) 어떤 감각을 일컫는 말이다. 이로부터 미학적 개념인 ‘숭고’(sublimity)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리오타르는 숭고야말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가장 중요한 미적 감수성이라고 지적하며, 그것을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는 데서 오는 감정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감정이 “과학의 능력, 기술, 자본이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무한성과 잇닿아 있다고 말한다. 전통적 미의식은 기준이 되는 대상을 성공적으로 재현하는 데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반면, 숭고는 재현할 원본이 없거나 예술적 재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대상을 재현하는 것에서 발견되는 미적 감각이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이런 ‘재현할 수 없는 것의 재현’을 가능케 해주는 수단으로서 작용하거나 비재현적인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창작자와 수용자의 미적 감수성을, 그리고 예술적 표현의 지표를 후자의 방향을 향해 열어 주는 것이다. 단순히 말하면 예술의 지향점이 과거에서 미래로 획기적으로 변화한 양상이 ‘숭고’라는 개념의 대두를 통해 상징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백남준에서 포스트휴먼까지 오랫동안 기술과 예술의 구분은 의심되지 않았다. 즉 예술은 미를 창조하며 쾌의 감정을 유발하므로, 목적에 도구적으로 종속되는 기술과는 구분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르네상스 이전까지만 해도 예술과 기술은 동일 개념으로 이해되었고, 그 어원 또한 ‘테크네’(techne)로서 같다. 오늘날 매체 기술의 진보, 특히 디지털화의 진전은 예술과 기술의 접점을 만들어 주었고, 예술적 상상력을 기술적 상상력에 기반해 표현하는 것을 촉진시켰다. 가까운 예로 개인 인공위성 발사로 화제가 되었던 송호준 작가 같은 이의 퍼포먼스를 들어보자. 어쩌면 그 일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어떤 기술자가 집념 어린 시도를 통해 개인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이야기 정도로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미디어 아트 작가로서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서 예술적 표현으로서 인공위성 발사를 기획, 실행한 것이었다. 이 퍼포먼스는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떠올리게 한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통한 생중계 퍼포먼스로서 알려져 있다. 백남준은 기술 진보에 따라 가능해진 새로운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을 이 퍼포먼스를 통해 타진해 보았던 것이다. 작품은 이제 화폭에 그려져 어느 시점의 어딘가에 전시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신호를 타고서 집집마다 놓인 TV에, 오늘날이라면 각자의 모니터나 스마트폰 액정 화면에 구현되고, 수용자와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며 작품 자체가 끝없는 변형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매클루언의 명제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한편 오늘날 또 다른 매클루언의 유명한 명제인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가 새로운 반향을 얻고 있는 듯하다. 인간 신체의 확장으로서의 미디어 발전이 어느 순간 반전해 신체의 미디어화라고 부를 만한 현상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포스트휴먼 개념에 관한 논의가 이 흐름을 집약해 보여준다.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이 모던의 이전이자 이후라고 했던 것처럼, 포스트휴먼 역시 인간의 이전이자 이후라고 포스트휴먼 논자들은 말한다. 인간 이후는 그렇다 치고 인간 이전이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이 구성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즉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이 표방하는 인간중심주의로부터의 이탈이다. 따라서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세워진 미학적 전제들도 의문에 부쳐진다.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유지되어 온 자연과 인공물(기술)의 이분법이, 나아가서는 비물질적인 주체와 물질적인 신체라는 이분법이 해체와 통합의 과정 속에 놓이게 된다. 서두에 제시한 바이오 아트의 실천들이 바로 이러한 현재진행형의 과정들을 상징해 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