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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조르조 아감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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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고와 증인
조르조 아감벤
2012 · Korea, Republic of · 264p
20세기 역사학과 인문학에 던지는 가장 도발적인 문제작. 책의 제목은 도발적이고 자극적이다. 즉. ‘아우슈비츠의 살아남은 자들’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밖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아니라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대상으로 역사학과 인문학의 핵심적인 쟁점들, 즉 증언, 기억, 진리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제기한다. 이를 통해 아감벤은 아우슈비츠를 둘러싼 수많은 풍설과 풍문과 오해를 바로잡는데, 그것은 곧장 역사학을 비롯한 수많은 인접 분야에서 논쟁을 촉발했다. 예를 들어 역사의 증인은 무엇을 증언할 수 있는가 하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그러하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증언할 수 있는 자들은 막상 죽어서 말이 없는데 살아남은 자들은 과연 증언자로서의 자격이 있는가? 그들은 무엇을 증언하는가? 과연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왜 가해자들은 항상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증언하는가? 물론 이 책에서 아감벤은 이것을 넘어서 아우슈비츠가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비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명의 어떤 비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생명정치가 주로 영토와 자원을 또 국민과 인구를 대상으로 살리거나 죽이는 것을 목표로 해왔다면 20세기 이후의 생명정치는 인간을 잉여로, 쓰레기로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Description

“근대 이전의 영토 권력이 ‘죽음의 공포’를, 그리고 근대의 생명 정치가 생명의 관리와 통제를 목적으로 했다면 20세기 이후의 생명 정치는 인간 자체를 잉여로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세기 생명 정치의 가장 고유한 특징을 규정하는 이 정식은 더 이상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살리는 것도 아닌, 살아남게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생명 권력의 결정적인 활동은 삶의 생산도 아니고 죽음의 생산도 아니다. 차라리 생존을 생산하는 데, 쉽게 변형을 가할 수 있고 또 잠재적으로 무한한 생존을 생산하는 데 있는 것이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시리즈의 비밀을 가장 대중적으로 드러내면서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윤리를 도모하고 있는 논쟁적인 문제작! 아우슈비츠는 브레히트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떠올리게 했으며,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즉 문학)는 가능한가’라고 묻는 등 아우슈비츠는 유독 문학에서 곧잘 사유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것은 20세기에 일어난 이 인류 최대의 사건이 너무나 비극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객관화되기 보다는 쉽게 주관화되어 ‘나치와 유대인 사이에 벌어진 특수한, 일회적 비극’으로 치부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의 <쇼아>라는 영화를 둘러싼 논쟁이 잘 보여주듯이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유대인 학살이 실제로 있었느냐’는 역사적 사실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감벤의 이 책의 제목은 지극히 도발적이고 자극적이다. 즉 ‘아우슈비츠의 살아남은 자들’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밖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아니라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대상으로 이 역사학과 인문학의 핵심적인 쟁점들, 즉 증언, 기억, 진리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제기하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감벤은 아우슈비츠를 둘러싼 수많은 풍설과 풍문과 오해를 바로잡는데, 그것은 곧장 역사학을 비롯한 수많은 인접 분야에서 수많은 논쟁을 촉발했다. 예를 들어 역사의 증인은 무엇을 증언할 수 있는가 하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그러하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증언할 수 있는 자들은 막상 죽어서 말이 없는데 살아남은 자들은 과연 증언자로서의 자격이 있는가? 그들은 무엇을 증언하는가 과연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왜 가해자들은 항상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증언하는가? 물론 이 책에서 아감벤은 이것을 넘어서 아우슈비츠가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비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명의 어떤 감추어진 비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지금까지의 생명정치가 주로 영토와 자원을 또 국민과 인구를 대상으로 살리거나 죽이는 것을 목표로 해왔다면 20세기 이후의 생명정치는 인간을 잉여로, 쓰레기로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으로 상징되는 인간을 ‘쓰레기’로 취급해 높은 굴뚝 위로, 공장제 방식으로 태워버리는 이 비극적 사건은 21세기의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동안 아감벤을 둘러싸고는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평이 있었으나 아감벤은 이 책을 ‘윤리에’에 대한 탐색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인간이 잉여로, 즉 쓰레기로 대량 생산되는 시대에 생명정치의 이러한 전략을 철저하게 인식할 때만이 비로소 인간됨에 대한 증언과 새로운 윤리의 모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이슬람교도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처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자들’로 넘쳐나는 우리 시대에 말할 수 없는 자들에 대해 말할 권리를 돌려주는 것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윤리이다. 그러나 아감벤이 그리는 아우슈비츠의 풍경은 비극과 슬픔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다시 구분이 있는데, 이 비인간의 수용소에서도 다시 인간 이하의 생명들이 있다. ‘이슬람교도’로 불리는 자들이 그들이다. 정확히 말해 짐승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이들은 말과, 인간으로서의 어떤 존엄도 없이 그저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슬픔도, 언어도, 시도 해당되지 않는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예외적이지만 사실은 이들이야말로 수용소의 진실, 즉 죽음 앞에서의 공포를, 죽음 앞에서 인간이 그저 살아 있는 생명으로 전락하게 됨을 보여주는 ‘수용소의 진정한 증인’이다. 하지만 이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말이 없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증거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이슬람교도인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수용소의 진실은 이들만이 알고 있다. 이것이 죽음의 수용소의 아포리아이며, 20세기의 모든 역사적 비극과 인간적 진실의 비극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슬람교도는 단지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오늘날 생명 유지 장치에 매달려 사는 혼수 상태의 사람이나 식물인간들에서 일종의 이슬람교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니 그러한 생명 유지 장치를 일종의 임금으로 바꾸어보면 우리는 길거리에서 수많은 ‘비정규직’과 ‘불법 노동자’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실업자/노동자라는 이원론적 대립을 벗어나 ‘비정규’와 ‘불법’이라는 현대의 ‘이슬람교도’들이 점점 더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저 1980년대의 삼청교육대 식의 폭력이나 범죄와의 전쟁 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권력과 폭력의 양상 또한 과거의 폭력/민주의 틀을 넘어 생명정치 쪽으로 가파르게 달려가고 있는 느낌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증언과 진정한 말의 회복을 새로운 윤리의 단초로 제시하는 아감벤의 혜안을 우리 시대의 새로운 윤리로서 새삼 주목을 요한다. 즉 이슬람교도가 기본적으로 ‘말을 잃은’ 생명이라고 할 때, 그리고 그들의 진실은 결코 ‘증언’된다고 할 때 이처럼 가공한할 만한 생명정치에 대한 투쟁은 올바른 말의 회복과 증언에서 출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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