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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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이론의 고전, 『젠더 트러블』 드디어 국내 출간! 현존하는 최고의 페미니즘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의 주저 『젠더 트러블』이 드디어 국내에 출간되었다.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구분을 허물고, 지배 권력의 토대인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의 본질을 폭로함으로써 기존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을 단숨에 전복시킨 이 책은, 역대 최고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주디스 버틀러를 학계의 슈퍼스타로 등극시켰다. 또한 버틀러는 이 책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그리고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현대 철학자들을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망했다. 그녀는 기존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문화적으로 구성된 성/본능적인 욕망이라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구분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반복된 각인 행위를 통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조작된 것이며, 그 기저에는 이성애자만이 주체이고 동성애자는 비체(abject)라고 선언하는 가부장적 이성애 중심주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범이 만든 허구이자 규제가 만든 이상이라는 의미에서 제도, 실천, 담론의 효과이고, 결국 그 셋 모두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광의의 젠더로 수렴되는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포괄하는 급진적 정치학이 되기 위해서는, 섹스 안에 전제된 문화적, 제도적 규제를 꿰뚫어보아야 하며, 어떤 특정한 섹슈얼리티를 비체의 기준으로 삼는 규율 권력의 지식 생산체계에도 비판적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버틀러는 주장한다. 또한 그 자신 레즈비언이기도 한 버틀러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 자체의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토대로, 동성애와 이성애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제도 담론의 권력 효과임을 폭로하고자 한다. 이는 페미니즘 이론이 여성의 권리 향상 차원을 넘어 남성까지 포함한 소수자의 섹슈얼리티 문제로 관심이 확대되는 지점이다. 동성애에 대한 버틀러의 새로운 인식론을 ‘퀴어(Qeer)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퀴어’는 원래 동성애자들을 경멸적으로 부르던 호칭이었으나, 버틀러에 이르러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고정하는 모든 담론적 권력에 저항하는 전복의 표어가 된다. 결국 버틀러는 모든 정체성은 문화와 사회가 반복적으로 주입한 허구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며 그런 의미에서 섹스나 섹슈얼리티도 ‘젠더’라고 말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젠더는 없다”. 모든 것은 법과 권력과 담론의 이차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의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구분되지 않을뿐더러, 젠더마저도 명사로 고정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몸도, 정체성도, 욕망마저도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모두 젠더이고, 그런 젠더는 안정될 수 없어 부표하는 인공물이자 동사이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강제된 질서를 뒤집는 전복적 상상력!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1부는 주로 ‘여성 없는 페미니즘’, 정확히 말하면 여성이라는 범주가 없는 페미니즘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도발적 문제 제기의 장이다. 2부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3부에서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모성적 몸과 기호계 논의를 비판하고, 위티그나 푸코 논의의 장점과 한계를 지적하면서 버틀러 자신의 독특한 젠더 논의를 정리해나간다. 1부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은 페미니즘의 주체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모색하며 뤼스 이리가레나 모니크 위티그의 문제의식을 끌어와서 이들의 기여와 한계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리가레는 프로이트 식의 결핍이나 결여로서의 여성성을 극복하려 했지만, 여성을 다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적 언어 안의 재현 불가능성으로 고정한다는 혐의로 비판받는다.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모니크 위티그는 강제적 이성애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에서 여성도 남성도 아닌 레즈비언을 대안적인 성으로 고정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장에서 핵심적인 사상은 페미니즘의 주체로서의 ‘여성들’은 아무리 복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도 범주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문화적으로 구성된 성/근본적이고 기원적인 욕망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강제적 질서에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섹스/젠더/섹슈얼리티는 몸/정체성/욕망으로 분명하게 구획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제도문화의 이차적 구성물이자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광의의 젠더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2부 「금지,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적 모태의 생산」은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페미니즘의 틀 안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비판하려는 것이다. 여성을 교환 대상으로 바라보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뿐 아니라 조앤 리비에르 이래로 여성을 가면으로 의미화하려는 정신분석학적인 논의들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특히 결여를 가리기 위한 가면으로서의 여성의 상징적 위치를 ‘팔루스 되기/가지기’라고 본 자크 라캉의 논의는 비판의 핵심에 있다. 게일 루빈이나 뤼스 이리가레도 또다른 방식으로 여성성을 물화한다는 혐의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버틀러는 여성 젠더의 일의성을 주장하며 젠더 정체성의 이분법에 의지하는 모든 논의들을 비판하면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우울증의 방식으로, 즉 사랑했던 대상이 주체의 에고로 ‘불완전하게 합체’되는 방식으로 젠더가 형성되는 과정을 논의한다. 정신분석학은 욕망을 전제한 뒤 그 욕망을 금지하는 법을 말하지만, 버틀러의 계보학은 그런 욕망이 선험적으로 원인이라 가정해두는 정신분석학의 전제에 들어 있는 규범을 보여주고자 한다. 푸코의 『성의 역사』에 나타난 억압가설 비판처럼, 금지구조나 사법구조는 원래 억압해야 할 욕망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욕망 역시 당대의 지배적 권력구조가 만들어낸 구성물임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영혼의 감옥인 것이 아니라, 영혼이 몸의 감옥이 된다. 마지막 3부 「전복적 몸짓들」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다. 크리스테바는 기본적으로 모든 섹슈얼리티를 이성애로 상정했고, 동성애는 정신병에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버틀러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녀의 이론은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이성애를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모성성을 특화하고 있으며, 라캉을 극복하려던 저항의 시도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코라나 기호계, 혹은 모성적 육체는 상징계의 언어로 발화되지 않으면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서 저항의 전복적 실천력을 상실했으며, 오히려 크리스테바의 논의는 모성의 재생산을 강화하고 어머니를 이상화하여 가부장제를 공고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이다. 위티그나 푸코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위티그는 레즈비언 주체를 제3의 주체로 이상화하면서, 또다시 어떤 이상적 대상으로 고정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비판당한다. 보편적 주체의 관점에서 논의를 진행했던 푸코는 남성을 보편 주체로 인식할 뿐 여성이라는 성차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간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받아왔는데, 버틀러는 여기에 더해서, 푸코가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 부치는 서문에서 『성의 역사』와 달리 양성인간 에르퀼린이 제도 규범하에서 겪었던 사회적 비극보다는 특정 섹슈얼리티의 낭만화와 이상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마지막에 버틀러는 메리 더글러스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논의를 끌어와 몸의 경계와 표면은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몸의 범주를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만들면서 새로운 의미화의 장으로 열어낼 때, 섹스와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이분법을 넘어서 모든 고정된 범주를 파괴하며 전복적 재의미화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버틀러가 주장하는 패러디적 수행성이고, 우울증적인 반복 복종의 실천들이다. 버틀러는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장의 제목을 ‘패러디에서 정치성으로’라고 썼다. 이는 드래그나 복장 도착 등의 ‘젠더 패러디’에서 출발한 젠더 논의가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