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도 괴리도 업시

성석제
2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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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소설집.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집필한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책이자, 작가가 1996년 첫 소설집을 출간한 이후 꼭 20년이 되는 해에 펴내는 새로운 소설집이다. 새 소설의 제목 '貧도 괴리도 업시'는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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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블랙박스 _7 먼지의 시간 _43 매달리다 _81 골짜기의 백합 _107 貧도 괴리도 업시 _139 사냥꾼의 지도 _177 몰두 _219 나는 너다 _255 해설 노태훈(문학평론가): 스토리텔링 애니멀 265 작가의 말 281

Description

스토리텔링 애니멀’성석제 신작 소설집 성석제는 의심할 여지 없는 프로 소설가이고 이야기에 한해서는 맹수에 가깝다. _노태훈(문학평론가)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_고려가요 「청산별곡」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우는 자들을 위한 노래 2014년 『투명인간』으로,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숨 돌릴 틈 없는 서사에 담아냈던 이야기꾼 성석제가 신작소설집을 출간하며 돌아왔다. 제목이 묘하다, ‘믜리도 괴리도 업시’.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고려가요 「청산별곡」에서 인용한 것으로,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이다. 고려시대 때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라고 한탄하며 청산으로 숨어들길 소망했던 어느 가여운 이가 있었다면, 2016년 성석제의 소설 속에는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그 어떤 대단한 환희나 통렬한 절망도 없이 꾸역꾸역 살아가다가, 어떤 ‘사건’ 혹은 ‘사람’과 맞닥뜨리는 인물들이 있다. 이 책은 2013년 12월부터 2016년까지 성석제가 집필한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책이자, 작가가 1996년 첫 단편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출간 당시 제목 『새가 되었네』)를 출간한 지 꼭 20년이 되는 해에 펴내는 새로운 소설집이다. 책의 표제작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동성애’를 다룬다. 아마 성석제의 애독자라면, 대번에 떠오르는 작품이 있을 것이다. 1996년 이상문학상 추천우수작에 올랐으며 지금까지도 한국 퀴어소설과 성장소설의 캐논(canon)으로 불리는 소설「첫사랑」. 1996년, 한국문학 독자들에게 강렬한 ‘첫사랑’을 각인시켰던 소설가 성석제가 2016년, ‘믜리도 괴리도 업시’ 돌아왔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가 성석제는 성실한 농부처럼 끊임없이 소설을 써왔다. 문학동네는 성석제 신작 소설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와 더불어 성석제의 초기 단편들을 가려 뽑은 성석제 걸작 단편선집 『첫사랑』을 동시에 출간한다.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하는 그 화려한 입담과 세상만물에 입과 사연을 만들어주는 솜씨는 여전하되, 그의 신작 소설은 동성애, 간첩 조작 사건, 멘토, 스마트폰 중독 등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뜨거운 현실을 끌어안고 더 가까이서 독자들을 매혹한다. 매일 반복되는 혼란과 곤란 속에서 조용히 곪아가던 ‘나’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흔들어 깨우는 ‘미친놈들’의 서사 표제작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제목만큼이나 기묘한 소설이다.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살아가던 중년의 ‘나’ 앞에 옛 친구가 나타난다. 어린 시절 ‘만인의 똥개’ ‘신데렐라’로 취급받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고 치이던 ‘너’는 내게는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자꾸만 엮이는 존재다. ‘나’는 그런 ‘너’가 거추장스럽지만 어쩐지 ‘너’와의 마지막 끈을 완전히 놓지는 못한다. ‘나’는 은연중에 ‘너’를 무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나’에 대한 ‘너’의 관심과 애정이 싫지 않다. 어느 날, ‘나’는 금발의 동성 애인을 둔 정상급 재불 화가가 되어 돌아온 ‘너’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너’는 화려한 외양과 성공의 표상들로써만이 아니라, ‘나’에게 대놓고 ‘커밍아웃’을 해서 나를 휘청거리게 한다. 고요하고 안온하게 허물어져가던 내 삶에 홀연히 다시 등장해 ‘미친놈’처럼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하며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이반(異般)’의 삶을 한껏 즐기는 ‘너’. ‘너’와 그 동성애인을 향해 ‘나’는 입을 비죽거리고 비아냥거리다 은근한 질투마저 느끼지만, 그 순간 ‘믜리도 괴리도 업시’ 살아가는 나의 따귀를 후려갈기듯 ‘너’의 일갈이 나를 훅 파고든다. “너희,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이성애자들은 꼭 그렇게 묻더라. 언제부터 게이였느냐. 나를 어떻게 생각해온 거냐. 나를 볼 때마다 몰래 흥분한 거 아니냐. 기분 더럽다…… 내 대답은 이래. 나도 눈이 있고 수준이 있거든?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내 취향이 아니야.” _「믜리도 괴리도 업시」 중에서 이 책을 열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소설 「블랙박스」에도 모래처럼 허물어져가는 일상을 견디다가 돌연 나와는 너무 다른 인물을 만나 전기를 맞는 인물이 있다. 「블랙박스」는 계간 『문학동네』 창간 20주년 기념호에 발표됐을 때부터 ‘미친 소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폭발하는 에너지로 가득한 작품이다. 언제부턴가 창작의 샘이 말라 도무지 소설을 완성할 수 없게 된 중견 작가인 내 앞에 동명이인인 ‘너’가 나타난다. 내 차에 블랙박스를 설치해준 카센터 직원이었던 ‘너’는 살갑게 다가와 호형호제하는 것은 물론 내가 앓아누운 사이 쓰다 만 소설을 마무리해주기까지 한다. 소설작법을 어디서 배운 적도 없고, 세상에 문명(文名)을 떨쳐보겠다는 거창한 목표도 없이 그저 몸으로 쭉쭉 소설을 써내려가는 동명이인의 ‘너’는 마치 ‘나’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 같다. 그날 이후 ‘나’는 ‘너’에게 본격적으로 소설 대필을 맡기게 되는데, 이 위험한 거래도 결국 파국을 맞는다. 난 작가라는 것들이 뭐 특별한 줄 알았지. 알고 보니까 별거 아니더구만. 그깟 소설 나부랭이 못 쓰겠네 안 써지네 하면서 살려달라고 남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더니 단물 쪽 빨아먹고 나서는 싸늘하게 배신을 때리네. (…) 이것들 뽕쟁이하고 뭐가 달라. 저 혼자 골방에서 약 빨다가 약발 다 떨어지면 밖으로 벌벌 기어나와가지고는 울고 짜고 훔치고 거짓말하고. 야, 씨발아,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필명으로라도 소설 써가지고 니들 동네 전부 말아먹을 수 있어. _「블랙박스」 중에서 앞으로 ‘우리’의 공동창작은 어떻게 될 것이며, 그 이전에 ‘너’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작가가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의 자의식과 고뇌와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블랙박스」는 메타소설조차 이야기의 힘으로 돌파하는 작가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강렬한 소설이다. 성석제표 농담과 웃음, 그 속에 깃든 시퍼런 대한민국의 현실 한편, 「먼지의 시간」에서는 성석제표 해학과 웃음을 느낄 수 있다. 대자연 속의 명상가이자 ‘이 시대의 정신적 스승’임을 자처하는 M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하게 된 ‘나’는 입만 열면 잘난 척 일색에 ‘구세활인염’이라는 만병통치약까지 파는 ‘정신적 스승’이 아니꼽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나’와 M은 핑퐁을 하듯 긴장감 넘치는 말씨름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묘한 애증의 감정마저 싹튼다. 이 소설은 멘토링과 명상, 자기계발의 신화를 추앙했다가 이내 손쉽게 짓밟는 세태 속에서 정작 ‘나’의 삶과 주변은 어떠한가를 날카로운 농담에 섞어 되묻는다. 성석제의 최근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들을 소설 속으로 끌어왔다는 점일 것이다. 「매달리다」는 그가 전매특허의 웃음과 농담을 완전히 거두어내고 묵직한 서사로 밀어붙인 작품이다. ‘납북 어부 간첩 사건’으로 불리는 실제 사건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이 소설은 굵은 느티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한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집중해서 매달리고” “바다에 매달리고” “생각에 매달리고” “아버지의 강건한 맨몸에 매달리고” “생계에” “침묵에” “사는 데” 매달리는 인물들. 다시 말해 “매달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인물을 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비단 간첩 조작 사건에 휘말린 어느 불운한 남자의 사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님을 뼈저리게 공감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성석제 소설의 한 축을 차지하는 것은 ‘몰두’와 ‘중독’의 유전자이다. 성석제 소설의 인물들은 무언가에 미치거나 매달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골짜기의 백합」에서는 여동생 ‘선녀’를 위해 자신의 생을 털어 바치는 한 여인을, 「사냥꾼의 지도」는 여행지에서 길을 잘못 접어들며 펼쳐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