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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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의 버스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발기했다. (시선과 이빨들1, 7p) 소설 ‘시선과 이빨들’의 창작자이자 주인공인 ‘정욱헌’은 13살적 버스 안에서 이름 모를 여자아이에 의해 ‘강제적 발기’를 경험한다. 버스 안에서의 비자발적 발기에 의해 자신의 몸을 망쳤다고 생각한 14살의 ‘나’는 어느 겨울날, “순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위스키가 필요하다.”는 아는 형의 말에 이끌려 ‘편의점의 순결’을 강탈한다. 하지만, ‘편의점 순결 강탈 사건’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되고, 이로 인해 친누나와의 사이는 멀어지며, 대화는 침묵이 된다. 24살 되던 해, 의사와 결혼한 누나가 불현듯 집에 찾아와 몹시도 서럽게 울던 순간에도, 나는 그저 옆에서 가만히 침묵한다. 그리고 일주일 후. 누나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이미 내가 알던 예전의 누이가 아니었다. 몹시도 물고기를 좋아하던 우리 누이는 물고기가 너무 좋아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시선과 이빨들1, 15p) 누나의 죽음 이후, 세월은 다시 흘러 28살이 된 ‘나’. 극도의 허무주의에 빠진 나는 어느 날 문뜩, 자살을 결심한다. 죽음에 이르는 적정량 이상의 수면제 섭취, 견고한 브랜드의 로프 아래서 목매달기, 혹은 자율적이며 자발적인 익사 등등의 효율적인 자살 방법에 대해 찾아보지만, 신문, 책, 텔레비전 어디에서도 죽음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직 ‘삶의 껍데기’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 급급하다. 할 수 없이 자살의 방법론에 대해 독학하던 중, 같은 과 후배를 만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받게 된다. 오빠, 나랑 함께 그 남자의 순결을 납치하자. 내 예전 남자친구의 순결. 어때? (시선과 이빨들1, 182p) 결국, ‘나’는 남성의 순결을 납치하기 위한 그녀의 계획에 동참하게 되고, 납치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지금껏 알고 있던 현실과 상상,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점차 사라짐을 느끼게 된다. 사건들이 끊임없이 뒤집히고, 관계없어 보이던 것들이 한데 섞이는 과정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의문에 빠져드는데. 모든 것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라지고 있어. 마치, 결혼했는데 매일 밤마다 자위행위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기분이야. (시선과 이빨들2, 中) 통제할 수 없이 허물어지는 실재와 환상의 틈새에서, ‘나’와 후배는 과거에 경험했던 기묘한 사건들을 하나둘씩 회상하며 주고받는다. 제발요. 제발, 절 좀 내보내 주세요. 하고 차가운 콘크리트 정신병원 방 안에서 이리저리 소리 높여 외쳤을 때, 언제나처럼 내 성기는,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는 아랫도리의 그것은, 발딱 몸을 일으켜 예의 그 바리톤 음성으로 날 위로해 줬지. “걱정마. 내가 있으니 외롭지는 않을 거다.” “제발, 그 입 좀 닥쳐! 전부 너 때문이야. 네가 지 멋대로 여자들 앞에서, 벌떡, 벌떡, 아무 때나 일어서서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라고!! 난 정말 원하지 않았어!!!” “정말이지 미안하다. 그럼, 내가 여기 남을 테니 아무 잘못도 없고, 순결한 너는 어서 밖으로 나가라. 간호사한테 가위하고, 마취제 좀 달라고 해봐라. 이참에 우리 헤어지는 거다.” 내 성기의 냉철하며 논리적인 위로에 무력감을 느낀 나는 그저, 엉엉, 울 수밖에 없었지. (시선과 이빨들2, 본문 中) 네 시계는 현재 시각 오후 4시 5분이야. 내 시계는 현재 시각 오전 3시지. 그러니까 너는 지금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구나. 04 : 05 p.m. - 03 : 00 a.m. ≠ 13시간 5분 04 : 05 p.m. - 03 : 00 a.m. = 1시간 5분 그러니까, 다행히도, 너는 지금 나를 13시간 5분이 아닌, 1시간 5분만큼 덜 사랑하는 거야. 1시간 5분만 여기 더 있다가 가자. 65분 뒤에 우리가 서로 동시성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너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 거야. 봐, 지금 내 시계는 벌써 3시 5분을 가리키고 있잖아. 우리 둘 사이 차이는 이제 겨우 1시간 남았구나. “아니야, 지금도 널 사랑해.”하고 내가 그녀에게 말하던 순간, 내 손목시계의 바늘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02 : 00 p.m.이 되었고, 그래서 차이는 반대방향으로 여전히 1시간 5분이었지만, “지금도 널 사랑해.”하고 벽시계 뻐꾸기처럼 나는 반복해서 말한다. 널 사랑해 - 지금 - 널 사랑해 - 지금 (시선과 이빨들2, 본문 中)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시선과 이빨들’ 중, 이번에 출간된 1부는 소설 전반을 통해 추리적 구성과 에로틱한 상상력, 날카로운 유머와 냉소적 우화가 돋보인다. 사이비 종교와 성폭력, 근친상간, 사디즘과 낙태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 무저갱의 모습, 또는 지장경에 등장하는 지옥에 대한 비유로서 묘사된다. 다만 그 지옥은 공포나 악마성만을 불러일으키는 계몽적인 형태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저주와 욕설들 사이에 연민이 있고, 부정과 모순 속에 뒤틀린 진실이 공존하는 우리네 일상의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2부와 3부로 진행될수록, 인터넷과 휴대폰, 가상 게임이 생활 그 자체로 자리 잡은 현대 사회에서 구원과 부활, 죄의식의 의미가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새롭게 탐구한다. 비록, 현대 철학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기는 하지만, 기독교 질서를 공격하기에 바쁜 서구 철학과 노선을 달리하는 것이다. 불교의 묘법연화경 사상 또한, 숫자와 미술을 통해 재해석된다. 뿐만 아니라 개념미술을 차용한 실험적 기법에 의해 전통적인 소설 구조를 비틀고, 해체한 후, 다시 재구성한 점은 기존 국내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특이한 방식이다. 예를 들어, 문장 부호만을 사용하여 페이지를 가득 채우기도 하고, 띄어쓰기를 불규칙적으로 하여 글 중간에 뻥 뚫린 듯한 여백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글자와 수학 기호는 한데 섞인다. 하지만, 이러한 ‘일탈적’ 시도들이 무질서해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기존 소설에서 부수적인 도구로 사용되던 각종 문장 부호나 기호, 여백이 소설의 내용을 극적으로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위와 같이 여러 실험적 형식과 기법에도 불구하고, 소설 ‘시선과 이빨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테마는 ‘시간’이다. 시간, 그리고 시간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죽음’의 개념은 사실 ‘만들어진’ 것이다. 창작자이며 동시에 등장인물인 ‘정욱헌’은 유사 이래 남성 권력이 생산하고, 독점 소유한 ‘시간’과 ‘죽음’이라는 개념을 단지, 그들 자신의 욕망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한다. 시계의 시침은 남성의 상징인 발기를 닮았기 때문에, ♂,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닌 욕망이 흐른다. (시선과 이빨들1, 120p) 내 생각인데, 발기는 또한, 죽음일 지도 몰라. (시선과 이빨들1, 108p) 도대체 왜, 왜, 시침은 시계의 중심부에 위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왜, 그렇게 애를 쓰며 제자리 돌듯, 빙글 - 빙글 - 박제된 숫자들을 끊임없이 가리켜야 하냐고. 그래 봐야 헛수고야. 마치 남자들이 내 주위를 돌며, 나를 향해 끝없이 발기하는 것처럼 택도 없는 짓이지. 시침은 영원히 숫자에 닿을 수 없어. 1분도 채 견디지 못하고, 닿기도 전에 떠날 수밖에 없는 역마살의 팔자들이 감히, 내 몸 속옷 하나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 더군다나 날 유혹하기에는 하나같이, 다들, 하하, 너무나도 작거든. 하하. 하하. (시선과 이빨들2, 본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