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인류 최고의 지혜, 이솝 우화의 원형을 만난다
‘이솝 우화’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담긴 인류의 가장 오랜 고전이며, 고대부터 현대까지 전 세계의 동화 민담 등 수많은 이야기에 영향을 미친 상상력의 원천이다. 하지만 이솝 우화는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문 고전이기도 하다. 이 책 『정본 이솝 우화』는 스페인의 엘 에스꼬리알 도서관에 보관되어 전하는 1489년 판을 옮긴 것으로, 구전·필사되던 이솝 우화를 집성한 가장 오래된 판본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은 서구 이솝 우화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헌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이솝의 생애와 우화를 그리스 원본의 내용에 충실하게 담아내 그 본래 모습을 온전한 형태로 전해준다는 점에서 가장 권위 있는 판본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이솝 우화의 기원
이솝 우화는 기원전 6세기에 이솝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솝 자신이 남긴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전승과정에서 수많은 판본이 생겨났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우화들이 이솝 우화에 섞여들기도 했다. 따라서 ‘이솝 우화’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원본에 국한하기보다 그 전승과정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야기의 한 양식으로서의 ‘우화’(fable)는 이솝이 살았던 기원전 6세기 이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8세기 헤시오도스와 아르킬로코스 등의 저서에 우화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밖에 인도나 이집트에서 유래한 우화들도 그리스 세계에 전해져 있었다(이 책의 1부 ‘이솝의 생애’의 서문에 “또다른 우화들은 리비아 이야기라 불렸”(19면)다고 한 구절도 그러한 유래를 짐작하게 한다). 그 때문에 이솝 우화를 모두 이솝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이솝은 단지 이 우화들을 수집한 인물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나아가 이솝이 후대에 창작된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헤로도토스의 『역사』 등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이솝이 실존 인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아마도 당대에 이미 ‘이솝’이라는 이름이 우화 전체를 대표할 만큼 유명했으며, 그래서 다른 우화들에 이솝의 이름이 덧씌워져 전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이솝 우화는 기원전 3세기경 바브리우스라는 인물이 운문으로 쓴 것이며, 기원전 1세기경에는 로마의 우화시인 파이드루스가, 서기 5세기에는 로마의 아비아누스가 40여 편의 우화를 남겼다. 그러나 완전한 형태의 ‘이솝 우화집’으로 정리된 것은 아니며, 이 과정에서 자신이 지은 우화나 출처가 다른 우화들이 이솝 우화에 포함되어 전해지기도 했다(당시에는 창작과 번역, 전승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후 유럽이 중세시대로 접어들면서는 그리스 전통의 쇠퇴와 함께 이솝 우화도 구전이나 필사본으로만 간간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솝 우화의 권위 있는 정본 완역
유럽에서 이솝 우화가 완전한 형태로 집성된 것은 르네쌍스의 시작과 함께이다. 비잔띠움 제국 말기인 14세기 그리스 수도사인 막시무스 쁠라누데스가 황제의 사절단으로 베네찌아로 건너가 그리스의 언어와 문학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전하면서 그와 함께 그리스어로 기록된 이솝 우화를 전한 것이다. 이솝 우화는 당시 지식인층의 그리스 문화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14세기 중반 리누치오 아레쪼에 의해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그것이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술과 만나 유럽 전역에 이솝 우화를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 쁠라누데스 판이 사실상 이후 이솝 우화의 모든 판본의 모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저본이 된 스페인어판은 1460년경 쁠라누데스 판의 라틴어역을 스페인어로 옮긴 것으로, 이솝 우화의 최초 활자인쇄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어 이솝 우화의 원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번에 펴내는 한국어역 『정본 이솝 우화』는 10년 전 출간되었던 것을 오류를 바로잡고 번역을 대폭 다듬어 새로운 장정으로 출간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특히 1부에 수록된 ‘이솝의 생애’이다. 이는 쁠라누데스 판을 통해 처음 소개된 것으로, 이후 유럽에서 출간된 대부분의 이솝 우화집 서두에 ‘이솝의 생애’가 놓이는 구성이 확립된 것도 이 쁠라누데스 판에 의해서이다. ‘이솝의 생애’는 쁠라누데스가 직접 쓴 것은 아니며, 그보다 앞선 시기에 필사된 다른 판본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이전부터 전승되던 것을 그가 기록으로 옮긴 것으로 짐작된다. 이 책에 기록된 이솝의 생애는 역사적 기록이나 전기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설화화된 이야기로, 이솝이 말더듬이에 추한 외모를 지녔다는 등 창작되고 과장된 면이 많다. 하지만 쉽게 화내고 기뻐하는 이솝의 인간적인 면모와 철학자 주인을 골탕먹이는 해학과 기지는 한편의 이야기로서 큰 재미와 즐거움을 주며, 그 풍부한 이야기성은 한편의 소설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그 때문에 ‘이솝의 생애’는 근대소설의 모태가 된 피카레스크 소설의 원류에 놓이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삽화 역시 주목을 요한다. 작자 미상의 이 삽화는 비슷한 시기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등 각국의 최초 활자인쇄본에 비슷한 형태로 거의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후 이솝 우화에 수록된 삽화의 기원에 놓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삽화는 15세기 중엽의 이솝 우화 이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우화 가운데 「살쾡이와 농부들」(193면)에서 살쾡이가 말의 머리와 매의 다리를 가진 상상의 동물로 그려진 점, 「두 마리의 게」(289면)에서 게가 가재로 그려진 점, 「호랑이」(301면)에서 호랑이가 상상의 동물로 그려진 점 등도 흥미롭다.
현대에 다시 읽는 이솝 우화
흔히 우화는 인간의 본성을 동물과 식물의 모습에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정본 이솝 우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솝 우화는 그러한 목적성보다는 이야기 자체가 우선인 이야기로 읽는 편이 온당함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이솝 우화는 하나의 교훈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간 대신 동물을 등장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자와 늑대와 까마귀 들이 각자의 본성을 지니고 인간처럼 말을 하며, 인간 역시 황소와 당나귀와 여우 같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지 않은 본성을 지니고 등장하는 세계를 그린 이야기인 것이다.
따라서 이솝 우화는 흔히 어려서 읽은 동화화된 이솝 우화 때문에 가지기 쉬운 오해와는 달리,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같은 도덕적인 교훈에 종속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솝 우화의 세계는 선악 이전에 강자와 약자가 선명한, “결국 늑대는 죄없는 양을 잡아먹고 말았다”(「늑대와 양」, 117면)의 세계이며, 강자와 약자가 서로 속고 속이는, “이렇게 여우는 수탉을 속이려다 수탉에게 속고 말았다”(「여우와 닭과 개」, 171면)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솝 우화는 약자의 처지에서 본 세계의 본질을 날카롭게 묘파하는 이야기이며, 약육강식의 혼탁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약자의 처세술이자 생존술이라 할 수 있다. 이솝 우화가 전 세계적으로 오랜 세월 생명력을 지니고 대중들에게 구전·전승되어온 까닭이 실은 거기에 있으며, 이솝 우화가 르네쌍스 시기 성경과 함께 활판인쇄의 대중적 보급을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한 까닭도 그것이다.
덧붙여, 우화는 대개 이야기 앞뒤에 교훈조의 설명이 붙어 있는 형태로 전해지지만, 이는 우화 자체에 속한 것이기보다는 전승과정에서 덧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이 책에서는 우화 자체가 내포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살리기 위해 원문에 붙은 교훈조의 설명을 생략했다). 실제 1부 ‘이솝의 생애’에서 이솝이 직접 여러 우화를 활용하는 방식을 보아도, 이야기 자체에 설명과 교훈이 딸린 것이 아니라 우화가 특정한 상황을 빗대어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수사적인 장치로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그리스에서 우화가 활용된 것도 유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