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마 클럽》의 작가 아르투로 페레스-레베르테의 새로운 도전
2008년 발롬브로사 그레고르 폰 레초리상 수상작
스릴러와 역사소설의 대가 아르투로 페레스-레베르테가 새로운 작품으로 돌아왔다.
발간 당시 유럽에서만 200만 부 이상 판매, 전 세계 30여 개국에 소개되는 등 연이은 화제를 낳았던 《뒤마 클럽》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스페인의 젊은 움베르토 에코’라는 찬사를 받게 했던 그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과 숨쉴 틈 없이 전개되며 서로 얽혀드는 겹겹의 이야기들을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탁월한 이야기꾼에서 진 일보하여 진정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는 평을 받은 이번 작품에서 페레스-레베르테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이야기 자체가 놀라우리 만큼 단순하다. 해안가 절벽 위의 망루라는, 마치 그리스 비극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의 주인공이 3일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이 내용의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레스-레베르테를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올려놓았던 박력 있는 전개는 빛을 발하며,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사건’이 없는 이 소설에서도 여전히 독자들은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소설 속 두 사람이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 말, 그들이 바라보는 한 장의 사진, 그림 하나가 어떤 극적인 사건보다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중해의 한 버려진 망루에서 그림을 그리는 남자,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그를 찾아온 병사,
찰나의 순간 얽혀버린 운명의 두 사람이
죽어가는 세상을 위해 치러내는 외롭고도 위대한 장례식
지중해의 작은 마을, 해안가 절벽에 위치한 한 버려진 망루에서 두 남자가 만난다. 한 남자는 전직 종군기자이자 저명한 사진작가로 현재는 지난 30년간 한시도 몸에서 뗀 적 없던 카메라 대신 붓을 들고 망루 내벽을 가득 채울 거대한 벽화를 그리고 있다. 그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전쟁화를 그리는 화가’안드레스 파울케스이다. 또 다른 남자는 파울케스가 수많은 전쟁 중 어느 한순간 스치며 찍었던 사진의 주인공으로 그 후 10여 년간 사냥개처럼 그를 추적한 끝에 지금 이 자리에 와있다. “도대체 왜 그토록 날 찾아다닌 거요?” 화가가 묻는다. “당신을 죽이려고요.”사진 속의 병사 이보 마르코비츠가 대답한다. 하지만 이내 병사는 당장 파울케스를 죽이지는 않겠노라고 한다. 자신은 그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고, 그가 자신의 사진에 대해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사실들이 있다고.
이렇게 시작된 마르코비츠의 이야기,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하여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이 맞게 된 참담한 비극은 파울케스의 말을 따르자면 “너무 뻔한”, 그가 30년 동안 목격해온, 그리고 그의 사진에 담기게 된 다른 사건들에 비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비극에 대한 무심한 시선, 그것이 파울케스가 찍었던 사진들의 특성이고 그가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여인 올비도가 그를 사랑했던 이유였다. 파울케스의 사진들을 통해 마르코비츠와 독자들은 소말리아에서 레바논, 걸프 만, 그리고 구 유고슬라비아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인간의 가장 저열한 본성들이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본다. 하지만 과연 사진으로 찍힌 것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일까? 그렇다면 왜 파울케스는 자신의 정체성과도 같았던 카메라를 버리고 붓을 잡게 된 것인가? 그리고 사랑했던 여인 올비도가 죽는 순간에도 셔터를 눌렀던 그가 그 마지막 사진만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진 속의 병사 마르코비츠는 그렇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답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파울케스, 그리고 독자들은 왜 지금 그가 무너져가는 망루의 벽에 전쟁화를 그리고 있는지, 그 진정한 이유를 깨닫게 된다.
“이미 말하지 않았소? 당신과 나……, 우리 두 사람 모두 그 안에 있다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벽화 앞에 다시 선 파울케스와 마르코비츠는 그들 앞에 놓인 이 거대한 그림은 어떤 과거의 잘못에 대한 후회도 보상도 아니며 전쟁으로 대변되는 불완전한 인간의 삶에 대한 그들 식의 정리, 어떤 개인적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20여 년간 전장을 누빈 ‘종군기자 페레스-레베르테’,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림 하나를 연구하는 데 수년 동안 공을 들이는 ‘작가 페레스-레베르테’, 마지막으로 죽음 앞에선 ‘인간 페레스-레베르테’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문학잡지 <리르>는 이 작품을 두고 “페레스-레베르테의 가장 사적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이러한 평가는 우리 세기의 가장 비극적인 전쟁들을 직접 겪었던 페레스-레베르테의 개인적 경험들(작품 속에 등장하는, 씻을 물이 없어 자신의 품에서 죽은 아이의 피를 묻힌 셔츠를 며칠 동안 입고 다녀야 했던 에피소드는 작가의 실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이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말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30여 년간 작가로 활동하며 글 안에 담고자 했던 모든 철학이 집대성된 작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