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 1917-1938

쉴라 피츠패트릭 · History
3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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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사의 대가 쉴라 피츠패트릭의 <러시아혁명> 혁명 100주년 기념판. 러시아혁명의 시작은 언제이며, 그 끝은 언제인가? 이 혁명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사건인가, 러시아를 역사의 나락으로 밀어넣은 파국의 전조인가. 혁명의 결과물인 소비에트 국가가 소멸한 오늘, 우리는 러시아혁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현대 러시아사와 소련사의 거목이자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모로 불리는 쉴라 피츠패트릭은 이 책에서 혁명의 거대한 과정과 그것이 남긴 유산들, 특히 볼셰비키와 러시아 인민들이 혁명의 어느 시기에 어떻게 화합하고 반목했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특히 이번 4판은 1991년 소비에트연맹의 붕괴 이후 공개된 '러시아 문서보관소'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서양 학계의 연구를 총망라한 저작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은이는 1917년 혁명.산업화와 근대화.계급론에 관한 논의는 물론 혁명기 프롤레타리아트 인민의 생활과 사상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갈피를 잡기 힘든 혁명과 혁명 이후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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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서문 9 01 배경 사회 41 혁명 전통 54 1905년 혁명과 그 여파, 1차 세계대전 68 02 1917년: 2월과 10월 혁명 2월 혁명과 ‘이중권력’ 91 볼셰비키 101 민중 혁명 106 여름의 정치 위기 112 10월 혁명 119 03 내전 내전, 붉은 군대, 체카 139 전시 공산주의 149 신세계의 전망 158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 164 04 네프와 혁명의 미래 후퇴의 규율 181 관료제 문제 190 지도부 내의 투쟁 197 일국 사회주의 건설 205 05 스탈린 혁명 스탈린 대 우파 227 공업화 추진 236 집단화 245 문화혁명 254 06 혁명의 종료 ‘완수된 혁명’ 271 ‘배반당한 혁명’ 280 테러 290 감사의 말 307 옮긴이의 말 308 주 314 정선 참고문헌 336 찾아보기 349

Description

소련사의 대가 쉴라 피츠패트릭의 『러시아혁명』 혁명 100주년 기념판 출간 러시아혁명의 시작은 언제이며, 그 끝은 언제인가? 이 혁명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사건인가, 러시아를 역사의 나락으로 밀어넣은 파국의 전조인가. 혁명의 결과물인 소비에트 국가가 소멸한 오늘, 우리는 러시아혁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되던 1917년 2월, 러시아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불어닥친 혁명의 물결은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끌어내리고, 부르주아지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한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2월 혁명).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발생한다(10월 혁명). 도시에 온통 붉은 깃발이 출렁이는 가운데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된다. 그러나 변화의 기운과 그것이 초래하는 혼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곧바로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와 권력을 되찾으려는 반볼셰비키 사이의 내전(1918~1920)이 발생한 것이다.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지난 10년간의 경제 후퇴를 만회하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도입했지만, 1920년 말이 되자 급속한 공업화·농업집단화·문화혁명 및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또 다른 격변을 초래한다. 1917년에 시작된 러시아혁명은 1937~1938년에 스탈린이 혁명가와 정치·행정·군사 엘리트를 상대로 대숙청을 벌인 뒤에야 마침내 그 불길이 사그라진다. 현대 러시아사와 소련사의 거목이자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모로 불리는 쉴라 피츠패트릭은 이 책 『러시아혁명』(초판 1982, 제4판 2017)에서 혁명의 거대한 과정과 그것이 남긴 유산들, 특히 볼셰비키와 러시아 인민들이 혁명의 어느 시기에 어떻게 화합하고 반목했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특히 이번 4판은 1991년 소비에트연맹의 붕괴 이후 공개된 ‘러시아 문서보관소’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서양 학계의 연구를 총망라한 저작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은이는 1917년 혁명·산업화와 근대화·계급론에 관한 논의는 물론 혁명기 프롤레타리아트 인민의 생활과 사상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갈피를 잡기 힘든 혁명과 혁명 이후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정리했다. 피츠패트릭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표로서 목소리를 냈다. 이 시기의 쟁점은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사회적 지지에 관한 것이었다. 피츠패트릭은 어떤 정치 체제든 어느 정도의 지지 없이는 오래 통치를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있었다는 피츠패트릭의 주장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바라보게 하는 기반이 됐다. 피츠패트릭이 창조한 개념은 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됐다. 피츠패트릭 이후에 소련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누구라도 피츠패트릭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셈이다. _옮긴이의 말 중에서 혁명의 쟁점 1. 네프의 성격 피츠패트릭에 따르면 ‘러시아혁명’의 기간을 정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쟁점들이 있다. 그 첫째는 1920년대에 추진된 신경제정책(네프)의 성격이다. 1920년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행정적 혼란과 경제적 파탄이라는 국내 문제에 직면했다. 계속된 전쟁으로 자원과 산업 시설이 황폐해졌고, 가뭄이 겹치며 농업 생산도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했다. 또한 1차 세계대전과 내전 기간에 도합 200만 명의 엘리트 계층이 국외로 망명하면서 국가 경제와 행정을 이끌 인력의 숫자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마침내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917년의 영웅이자 볼셰비키당의 지지 기반이었던 이들의 이반은 당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결별을 상징하는 듯했다. 볼셰비키는 네프를 도입하며 이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체제는 산업의 완전한 국유화를 포기하고, 사적 부문을 허락했다. 도시에서 사적 거래와 소규모 개인사업을 허용했으며 농촌에서는 농민들에게 소자본가적 농업 경영을 장려하기도 했다. 또한 농민이 생산한 식량의 징발을 중지하고 현물세를 도입했다. 국가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가져가는 대신 일정량만 가져가고 농민의 생존을 보장하겠다는 뜻이었다. 피츠패트릭은 이 시기를 새로운 소비에트 체제가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단계로 정의하며 혁명의 기간을 확장시킨다. 체제 외부에서 보기에 네프는 명백히 훌륭한 발전이자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변화였다. 그러나 볼셰비키 평당원들 사이에서는 당이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잃고 분열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 축적은 부르주아 산업혁명의 전제조건이며, 공업화를 추진하려면 소비에트 체제도 자본을 축적해야 했기 때문에 네프 시기는 1917년 혁명과 이후를 잇는 필연적 과정이었다는 설명이다. 혁명의 쟁점 2. 스탈린 혁명의 성격 두 번째 쟁점은 1920년대 후반에 네프를 끝내버린 스탈린의 ‘위로부터의 혁명’이 지닌 성격이다. 피츠패트릭은 레닌의 혁명과 스탈린의 혁명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쟁점은 1917년과 1929년이 닮았는지 여부가 아니라, 후자가 전자에서 이어지는 과정의 일부였는지 여부이다. 1927년에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비롯한 반대파를 상대로 투쟁하면서 정치가 불안해졌고, 이 위기는 1928년 초 몇 달 동안 스탈린이 농민계급과 대립하고 옛 ‘부르주아’ 전문가를 배신자로 고발하면서 더욱 악화됐다. 스탈린이 추진한 급격한 공업화, 그리고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네프를 철회하고 새로 채택한 제1차 5개년 계획에 국가의 거의 모든 것이 동원되었다. 10년 전 전시 때처럼 필수품의 보급이 되살아나고, 국가는 도시의 경제·분배·거래를 다시 장악했다. 네프맨들은 체제와 언론의 공격을 받고 투기 혐의로 처벌되거나 알아서 도피해야 했다. 피츠패트릭은 특히 이 시기에 농촌에서 전개된 집단화를 진정한 의미의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규정한다. 체제는 집단화를 통해 증가한 생산력을 근대화·공업화에 동원하려 했다. 그러나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작물의 40퍼센트를 국가에 조달해야 했던 농민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체제에 저항했다. 그리고 체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많은 수의 농민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옮겨가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도시로 떠난 농민의 숫자는 1931년 한해에만 250만 명, 1928년부터 1932년까지 무려 1,000만 명에 달한다. 피츠패트릭에 따르면 이 시기를 거치면서 소비에트 신체제가 공고화된다. 스탈린 혁명으로 국가의 통제가 도시 경제 전체에 직접적으로 확산됐고, 농업 분야에 대한 국가의 착취도 크게 증가했다. 또한 이것은 경찰력을 크게 키우고 굴라그(교정 노동 수용소)를 만들어서 인민에 대한 억압을 강화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소련의 특징이 될 “닫힌 국경·포위 심성·문화적 고립”이 확립된 것이다. 혁명의 쟁점 3. 대숙청의 성격 마지막 쟁점은 1937~1938년의 대숙청을 러시아혁명의 일부로 간주해야 하는지 여부이다. 피츠패트릭은 대숙청 시기를 지나고 나서야 혁명이 끝났다고 말한다. 대숙청은 혁명에 남아 있던 것들, 이를 테면 이상주의, 변모를 향한 열정, 혁명적 어휘, 그리고 혁명가까지 불태워버린 혁명적 열병의 마지막 발작이었다는 설명이다. 1928~1932년에 추진된 제1차 5개년 계획(이름과 달리 4년 만에 완수되었다)이 거대한 공장과 철도, 수력발전 댐 등의 상징물을 남기고 완수되자 혁명이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론에서 사회주의혁명은 계급 적대와 착취가 소멸되고 마침내 국가가 사라지는 것으로 그 임무를 다한다. 강력한 ‘소비에트 국가’를 건설하려던 체제는 ‘국가의 사멸’이라는 달성할 수 없는 명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론상의 차이점을 도입한다. “알고 보니 국가의 사멸은 공산주의하에서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적대적 자본주의·국민국가들 틈에 낀 소련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강력한 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