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Description
법정 스님 최초의 법문집 서울 성북동의 작고 아름다운 절에서는 계절마다 사람들이 절마당을 가득 메운다. 멀리 강원도 산중 오두막에서 이른 새벽에 세상으로 나오는 법정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이다. 봄에는 향기로운 꽃그늘 아래서, 여름에는 장맛비를 피해 천막을 치고서, 가을에는 마음까지 물들이는 단풍나무 아래서, 그리고 겨울에는 예고 없이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청중들은 스님의 말씀에 고요히 귀를 기울인다. 법문 장소는 때로 명동성당으로, 뉴욕 맨해튼으로, 세종문화회관으로, 청도 운문사와 원불교 대강당으로 옮겨졌고, 그때마다 멀리서 찾아온 청중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 모임이 아름다운 것은 말씀의 행간에 침묵이 있고, 서로 귀 기울이며 존재의 기쁨을 함께 누리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영적 스승인 법정 스님의 법문은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해 왔다. 단순하고 청빈한 생활의 실천가이자 자유로운 정신의 표상인 법정 스님의 맑은 법문은 이 시대의 정신적 양식이자 영혼의 샘물이 되어 주고 있다. 쓸쓸히 잠든 이에게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고, 외로운 이의 마음속 뒷마당을 정갈하게 쓸어 주는 다정한 손길 같은 말씀. 그 한마디에 어떤 이는 잃었던 웃음을 되찾았고, 어떤 이는 함박눈처럼 펑펑 울고 나와 차꽃보다 맑은 영혼의 밭을 갈기로 마음먹었다. 어부의 그물에 갇힌 물고기처럼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들은 마음을 늦추고 낮추는 기쁨을 발견하였다. 세대와 종교, 사상과 가치관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게 깊은 영혼의 울림을 선사하는 법정 스님의 법문은 소중한 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 시대의 맑고 향기로운 삶의 화두이다. <일기일회>는 그동안 법정 스님이 법문한 말씀을 최초로 책으로 엮은 것이다. 법문은 법法의 길로 들어가는 문門, “우리들 마음 그대로가 법문이다” “우리들 마음 그대로가 법문이다. 우주 자체가 법문을 들려주고 있으니 주위를 잘 살피라. 우리는 법문을 통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살피고, 바로 여기서 살 수 있어야 한다.” 형식과 절차보다 그 본연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스님은 우리가 법문을 듣는 이유는 저마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좋은 말이 넘쳐 나도 자신의 이야기로 듣지 못한다면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법문의 한자는 法文이 아니다. 法門, 즉 ‘법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법에 이르고 진리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결국 법문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주목받는 여러 법문들이 있지만, 법정 스님의 법문이 특히 더 많은 이들의 가슴과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질문과 답이 바로 오늘의 언어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현재의 고통에 굴복해 자살을 시도할 때 스님은,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며 스스로를 해친 자해의 업을 짊어지고 다음 생으로 건너가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49~54쪽) 불황과 경제 위기로 모두가 불안해할 때는, 모든 일이 뜻대로 된다면 좋을 것 같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그렇게 되면 어려움을 모르게 되어 삶에서 영적인 깊이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또한 우리에게 닥친 불행도 다 한때이고 스스로 불러들인 삶의 매듭임을 일러 주며, 불행도 행복도 피하려 하지 말고, 삶 자체가 되어 살아가라고 이야기한다.(34~39쪽) 조류독감과 광우병 앞에서는 이 같은 불행이 생기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일깨우며,(68~69쪽) 삶의 터전인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외면하지 않는다. 인터넷의 발달로 진정한 만남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는 “접속하지 말고 접촉하라.”고 조언하며 영혼의 메아리가 살아 있는 삶의 길에 대해 이야기한다.(119~120쪽) 청중들은 말씀의 교훈을 ‘지금 자신의 삶에 고스란히 비춰 보고 스스로에 대한 물음으로 여겨, 각자의 그릇에 따라 다양하게’(106~107쪽) 받아들인다. 삶으로써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오늘날 설해지는 법문의 상당수가 당나라를 비롯한 과거의 훌륭한 법문들을 재해석하거나 그것들의 원래 의미를 밝히는 데 그친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그 당시의 최선이 오늘의 최선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살아 있는 화두를 지녀야 합니다. 죽은 화두를 지니고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 화두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상황에서는 살아 있는 화두의 역할을 했지만, 이 시대에 와서 우리가 그것을 관념화시키면 살아 있는 화두가 될 수 없습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화두는 어디에 있는가? 진짜 살아 있는 화두는 사거리나 동네 길목 또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찾기 때문에 삶의 절실한 명제인 화두를 놓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깨어 있는 사람은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삶의 문제이자 과제인 화두와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화두입니다. (178쪽) 말씀 그대로 법정 스님의 법회와 법문은 지금 내 가슴에 남겨져 있는 상처를 나누는 시간이며, 내가 지고 온 짐을 부리는 방법을 찾는 공간이다. 어느 날 법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스님은 이런 바람을 이야기했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한 사람 한 사람 마주 바라보면서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 그립습니다. 진정 좋은 법회라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주고받아야 합니다.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뜻있는 만남과 모임은 좋은 말을 많이 늘어놓는 데 있지 않습니다. 침묵 속에서 마주 바라보고, 서로 귀 기울이고, 같이 느끼면서 존재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343쪽) 추상적이고 의례적인 모임보다는 마음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자리를 꿈꾸는 스님의 마음이 전해진다. 형식화되어 가는 법회에 대한 스님의 아쉬움도 읽을 수 있다. 2,500년 전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모여서 주고받은 이야기가 경전으로 결집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그들 경전 어디에도 부처님 혼자 설한 집회는 나오지 않는다. 항상 그곳에 모인 대중과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갔던 것이다. 법정 스님의 법문을 보면, 비록 스님은 우리와 동떨어져 강원도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지만, 우리들 자신보다 현재 우리의 고민을 더 잘 알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오래될수록 편안한 벗처럼 늘 곁에 두고 있다가, 언제든 다시 꺼내 보고 싶은 것이 법정 스님의 말씀이다. <일기일회>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생길 때마다 펼쳐 들고 법정 스님과 깊은 내면의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제공한다. 언젠가 세상에 없을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법정 스님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메시지 법문 속에는 “몹시 춥거나 더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 제자가 있고, “추울 때는 추운 곳으로 가고, 더울 때는 더운 곳으로 가라.”고 일깨우는 스승이 있다. 그 스승의 입을 빌려 법정 스님은 말한다. “삶 자체가 되어 살아가라. 그것이 불행과 행복을 피하는 길이다.”(32~35쪽) 한 수행자가 어떤 것이 가장 대단한 일인가를 묻자, 스승은 홀로 우뚝 대웅붕에 앉으라고 설한다. 저마다 자신이 몸담아 사는 장소에서 홀로 우뚝 앉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 깨어 있는 존재인 것이다.(65~66쪽) 법정 스님은 산중의 깊은 침묵과 명상에서 길어 올린, 진리의 길과 행복의 길을 그때그때 그 자리에서 청중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 내어놓는다.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법문의 일관된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삶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하는가? 나는 진정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이런 근원적인 물음을 지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