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Description
“나는 믿음과 의심을 한자리에 놓으려고 해” 꼭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 나와 세계를 지키기 위한 백은선의 뜨겁고 차가운 사랑의 방식 여성으로 살고 견디며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일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인생이라는 것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삶과 자신 사이의 지속적인 어긋남, 그 미세한 틈을 끝없이 노려보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지 자주 다짐했어요. ―백은선, 2021년 3월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201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백은선의 세번째 시집 『도움받는 기분』(문학과지성사, 2021)이 출간되었다. 들끓는 시어가 가득 찬 첫번째 시집 『가능세계』(2016)로 ‘가장 뛰어난 첫 창작집’에 수여하는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한 백은선은, 이어 두번째 시집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2019)에도 범람하는 문장에 슬픔과 불안을 새겨 실었다. 또한 최근 시인, 작가, 노동자, 엄마로서의 자신을 거짓 없이 보여주는 산문집을 출간하며 더 많은 독자를 만나고 있다. 『도움받는 기분』에서 백은선은 사라진 기억의 지도를 만들듯이 무너진 마음을 계속 쌓고 다시 허물면서 겹겹이 아름다운 무늬를 그려낸다. 첫 시집이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절망 속에서 차라리 모든 것이 끝장나기를 바라며 휘갈겨 쓸 수밖에 없는 “소진된 우리”(조연정, 첫 시집 해설)의 일기였고, 두번째 시집이 잊힌 장면을 이어붙인 필름이었다면, 이번 시집은 매일매일 벌어지는 작은 싸움들의 기록처럼 보인다. 시인은 시와 자신을 계속 의심하면서 쉽게 타협하지 않는다. 오늘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솔직한 사람은 손해를 본다는 말도 있는데, 그렇다면 솔직한 시도 손해를 보는 것일까. 백은선은 내가 아는 가운데 가장 목소리에 가까운 시를 쓰는 시인이다. 너무 육성에 가깝게 느껴져서 그 정교한 만듦새가 가려질 정도라고 해야 할까. 사실 이건 손해도 무엇도 아니다. 그저 그의 시가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우리에게 가깝고 진하게 전해져온다는 뜻일 뿐이다. 삶에 한없이 육박해오고, 그게 너무 좋아서 질식해버릴 것만 같은 것이 백은선의 시다. 날것처럼 보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세공품이고, 선명한 목소리면서 동시에 강렬한 이미지가 된다. 한국 시에 존재한 적 없고 이후로도 존재하기 어려운 독보적인 시의 영역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은선의 시를 읽는 일은 일종의 증인 되기라 할 수 있겠다. 저 처절한 고백의 형식을 기억하고 듣는 증인이자, 한국 시에 벌어지는 사건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황인찬(시인) 엄청나게 선명하고 믿을 수 없이 가까운 고백 어떤 사건은 영혼의 각도를 틀어놓는데, 결코 수정될 수 없는 비틀림도 있다 그런 순간들을 여러 차례 관통하다 보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1g의 영혼」 부분 백은선의 시는 잊히지 않는 기억과 오래 품어 물러진 감정을 흩뜨려 여러 겹으로 펼쳐놓는다. 의미가 함축되어 무거운 단어가 아니라 끓어오르는 물거품, 흩날리는 눈발, 쏟아지는 빗소리처럼 가볍게 겹쳐지는 문장들이 그려내는 백은선 시의 풍경은 황량하지만 아름답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 그 겹을 이루는 낱낱의 결정들이 한층 선명해진 듯하다. 산문집 출간 이후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시인은 『도움받는 기분』에 수록된 시들이 “최대한 스스로에게 두었던 금기를 깨며 나아가는 방식으로” 씌어졌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이 시집 속 시들은 시창작 기법과 멀어지고, 시인 스스로 혹은 창작자를 통해 사회가 금기라고 주입해왔던 것들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숨김없이 펼쳐져 있는 문장에는 시가 씌어지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시가 뭘까//언니 나는 궁금한 것이 없어/그게 제일 궁금한데 그런 것도 모르면서 시를 써도 될까?”(「언니의 시」). 이 시집의 화자는 시라는 게 무엇이든 간에 기억을 붙들고 “남아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이다. 기억은 직접 경험했지만 과거에 겪어 이미 멀어져버렸기 때문에 “진실에 가깝고 거짓에 동일”한 것이다. “내 기억보다 더 진짜인/진짜를 갖고 싶”어서 시에서 “기억이라는 구멍 나고 부서진 조각들을 애써/그러모으며/다시 복원하려고 안간힘 쓰며/지랄”하지만, “무엇도 알 수 없고 단지 전해지지 않는 온도와 공백에 골몰하”다가 “손톱 끝을 물어뜯으며 슬프다고 슬프다고……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결국 고백하겠지”(「퀸의 여름」 「1g의 영혼」). 그 고백 사이사이 상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며(「사랑은 보라색일 것 같다」) “다짐 같은 게 얼마나 쉽게 손상되는지”(「비천의 형식」) 안다고 백은선의 시는 이야기한다. 시집 곳곳에 놓인 순도 높은 솔직함을 마주칠 때마다 독자는 의아한 편안함을 느낄 것 같다. 이해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어서 시를 읽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은 그래도 세상은 따뜻하고 아름답다는 합리화가 아니라 아픔을 껴안는 아픔일 수 있으니까.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쓴다 평안하고 무탈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것은 고요한 행복의 편안함이 아니다. 투지를 불태우며 투쟁해야 얻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것을 안다. ―『나는 내가 좋고 싫고 이상하고』에서 꽃도 열매도 없이 오래 살자 누구의 꽃도 되지 않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연결 지점」 부분 수록작 총 53편이 씌어진 시기는 첫 시집이 출간되고 나서인 2016년부터 2020년까지다. 끝장날 것 같던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종말 직전 어디쯤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그사이 많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특히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운동처럼 시인이 바로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사건들도 있었다(“마주한 곳에는 돌아선 등이 가득했고 감을 수 없는 눈은 전부 목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인의 글」). 사건들 이후, 우리는 오지 않을 추상적인 종말을 바라기보다 서로를 위해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견디며 좀더 낫게 바꿔보려고 애쓰게 된 것 같다. 백은선이 익숙하게 생각하던 방식을 전혀 새롭게 보려고 시도한 원인을 그것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시인은 많은 사람이 예술이라고 말해왔던 것이 정말 예술이냐고 묻는다(“재미있지 않니/모든 여자가 스물한 살이었거나/스물한 살이 될 거라는 게/고통받을 거라는 게//보는 눈이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게”, 「클리나멘」; “그 시는 슬픔에 관한 시가 아니다 그 시는/슬픔을 주장하고 슬픔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시”, 「비천의 형식」). 고백의 형태로만 씌어질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멀찍이 상공에서 내려다보며(「클리나멘」) 무력감을 느끼던 “소진된 우리”는 바닥에서 기록하면서 힘을 얻는다. 개인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를 투영하면서 자신의 바깥으로 한 걸음 나아간 이 시집은 그래서 지난 시집과 함께 읽었을 때 일종의 성장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백은선의 시가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있지 않다”(「月皮」, 두번째 시집 산문)는 오래전 누군가의 말은 이제 틀리다. “쓸모를 고민하지 않고 살아 있어도 된다고” 이 시집을 통해 말할 수 있게 된 백은선은 굳지 않고 흐를 것이다. 그리고 매일의 작은 싸움을 기록할 것이다. “지지 마/꼭 이겨줘//마음껏 생각할 수 있게/생각한 대로 움직일 수 있게”(「우리가 거의 죽은 날」). 시인에게 과거는 종료된 게 아니라 현재를 이루는 뼈에 해당하는 시간대이므로, 시에서 과거라는 거짓은 모두 현재의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 소환된다. 복기를 진행하는 순간에도 중요한 것은 과거를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지금 이곳의 ‘나’가 뚜렷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사라져선 안 된다는 것. 지금으로부터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목소리가 오직 저 자신의 목소리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