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모퉁이에서 가만히 짚어보는 흔적의 미학
마지막에 그가 노래한 대로, 점점 멀어지는 빅뱅 속의 우주처럼, 우리는 점점 더 외로워질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다만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겠다. 오래 침묵하며 오래 모순 덩어리를 그냥 안고 살아온 덜떨어진 이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이 시집 속에서 헤아려주는, 외로워도 울지 않는 길을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고운기·시인
부분을 정성으로 매만진 사람은 저도 몰래 전체를 돌보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이 책에선 버릴 말을 찾기가 어렵다. 한 권의 시집은 한 편의 시 같고, 한 편들은 어쩌면 격렬한 정신의 ‘헬스’를 거친 한 줄들 같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는, 강산이 변하도록, 얼마나 많은 말들을 품었다가는 내려놓아야 했을까. ―이영광·시인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2001) 이후 11년 만에 강연호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기억의 못갖춘마디』가 문예중앙시선(015)으로 출간되었다. 지난 세 권의 시집에 이어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은 일상의 삶이 품은 비애를 가만히 추적하며 슬픔과 허무의 맥을 짚어나간다. 특히 이번 시집은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우려낸 듯한 정서를 시 곳곳에 품고 있다.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에서 “오래 서성”이며 “불 꺼진 방”들이 품고 있는 “깊은 표정”을 읽고자(「시인의 말」) 하는 마음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적당한 온도에 적당한 습기를 머금고 있는 시어들은 행과 행 사이에 안온하게 깃들어 있어 몇 번이고 곱씹어 읽게 하는 힘을 지녔다. 그 안에서 때로는 엄살 같기도 하고 투정 같기도 한 나직한 외침들이 끝내 지순한 슬픔으로 변모해가는 서정적인 체험을 가능케 하기에, 그의 시는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매번 다시 살아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것
추워서 뜨거웠고 어두워서 환했던
기억이 있다, 그 불량의 시절인 듯
연탄불처럼 다시 층층 포개지고 싶다
포개져 마침내 화르륵 타오르는 체위이고 싶다
―「몸살」 부분
시간을 품고 있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흔적”과 “얼룩”과 “금”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 기억의 기록과 같은 이 시편들이 품고 있는 “흔적”의 미학 또한 여기서 출발한다. 해설을 붙인 이찬 문학평론가는 「몸살」에 부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몸살’이란 결국 ‘그 기억에 살이 낀 것’, ‘그 기억’이 모두 쓸어안을 수 없기에 ‘혼자 열없이 열 오른 것’, 시인의 마음결에 가라앉은 어떤 ‘흔적’과 ‘얼룩’과 ‘금’에서 솟아오른 것이다.”(이찬 해설, 「‘아우라’의 글쓰기, ‘사이’의 존재론」) 낱낱의 기억들이 현재로 소환될 때마다 새로운 화학반응들이 일어난다. 그것은 한바탕 “울음”으로 해소되기도 하고, 끈질긴 “침묵”으로 수렴하기도 하며, 때로는 한숨으로 때로는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문득 나 역시 늘 도망치며 살았다는 생각
사람을 피해 떠돌았다는 생각
이제 누군가를 만나면 내가 이민족 같다
연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몽골인지
혹은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글라데시인지
사방팔방 북상과 남하의 갈림길에서
잠시 지쳐 머물다가
다시 떠날 채비에 분주한 철새 같다
―「디아스포라」 부분
시간의 깊이와 그 얼룩덜룩한 감각의 질감들을 현재의 시간으로 되살려내려는 시인의 기투는 ‘회감’의 처연한 울림에 머물지 않고, ‘차이’, ‘타자’, ‘소수자’, ‘정치시’ 등과 같은 말로 호명되었던 최근 한국문학의 흐름에 합류할 수 있는 예술적 짜임새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갈래의 흐름으로 이 시집을 관통한다. 하나는, 시인의 가슴속에서 새어나오는 ‘허무주의’의 리듬감을 지닌 시편들이며, 다른 하나는 시인의 자아분열감 '시인이 획득한 여유와 지혜를 엿보게 하는'을 돋을새김의 문양으로 펼쳐낸 시편들이다. 이는 “이 생에서 디아스포라 아닌 자/어디 한번 나와 보라고 해/먼저 돌을 던지라고 해”(「디아스포라」),“나는 짐짓 지구본마냥 고개 기울여/늘어난 얼굴들을 빤히 쳐다보며 묻지, 누구시더라?”(「데자뷰」)와 같은 구절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두 개의 굵은 줄기는 시인이 지닌 성찰의 힘을 통해 “깊이의 리얼리즘”으로 번져나간다.
꺼이꺼이 불러 봐야 우주는 서로 멀어지고
우리는 점점 더 외로워질 것이다
지금 당장 이웃을 사귀어야 하는 이유다
―「빅뱅」 부분
늘 “금 위에서 머물고팠다”고 고백하는(「금 위에서 서성거리다」), 어린 방울토마토의 “저 가엾은 연초록을 어떻게 잘라낼까” 망설이는(「방울토마토 기르기」) 데서 드러나는 모질지 못한 시인의 마음은 시가 발원한 그 깊이, 시가 지닌 여린 속살을 짐작게 한다. 삶 속 세밀한 풍경들을 보듬는 마음에서부터 먼 우주에 흩어지는 외로움 외침에까지 귀 기울이고자 한 시편들은 우리 삶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다른 빛깔들로 촘촘히 수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