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타자들

이졸데 카림
3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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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미국, 마크롱의 프랑스를 낳은 정치적 욕망의 근본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책으로, 2018년 하노버 철학도서상을 수상하였고 미래의 책 10선에 선정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타자 혐오라는 현상의 배경인 다원화 과정을 추적하여, 오늘날 주체와 정치적 욕망에 대한 극히 날카로운 분석을 전개한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다문화’가 욕으로 쓰이며, ‘여성 혐오’를 둘러싼 분쟁이 지속되는 한국 사회에 때맞춰 도착한 예리하고 지적인 정치철학 에세이다.

Author/Translator

Table of Contents

들어가며 7 1장 과거─동질 사회라는 환상 11 2장 지금─다원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33 3장 종교 무대─다원화된 신앙인 73 4장 문화 무대─근본주의의 저항 105 5장 정치 무대─팬으로서의 참여 145 6장 정치 무대─포퓰리즘의 부상 185 7장 정치적 올바름의 무대─좌파와 우파의 정체성 정치 233 나오며─‘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징후적 질문 295 감사의 말 299 주(註) 301

Description

2018년 하노버 철학도서상을 수상하고 스티븐 핑커, 레비츠키·지블렛과 나란히 ‘미래의 책’ 10선에 선정된 이졸데 카림의 화제작 『나와 타자들』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트럼프의 미국, 마크롱의 프랑스, ‘브렉시트’의 영국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타자 혐오라는 현상의 배경인 다원화 과정을 추적하여, 오늘날 주체와 정치적 욕망에 대한 극히 날카로운 분석을 전개한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다문화’가 욕으로 쓰이며, ‘여성 혐오’를 둘러싼 분쟁이 지속되는 한국 사회에 때맞춰 도착한 예리하고 지적인 정치철학 에세이. 트럼프와 마크롱이 일찍이 간파한 것, 우리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 마크롱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프랑스, ‘브렉시트’로 혼선을 빚고 있는 영국에서 오늘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진정한’ 정치의 실현을 위해서 ‘새로운’ 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시도가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붕괴에 대해 준엄히 경고하는 자유주의 정치사상가들, ‘지성’의 반대편에 ‘반지성’을 설정하는 정치평론가들부터 ‘좌파 포퓰리즘’(샹탈 무페)이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좌파까지. 그 모든 분석에서 공통적인 지적은 정치가 예전같이 작동하지 않으며, 대중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지구적 세계화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귀환이라는 도식 속에서 ‘포퓰리즘’은 비이성과 연결되고, ‘난민 혐오’는 극복해야 할 부정적 감정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도식은 결국 계몽이나 각성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남긴다. 이졸데 카림에 따르면, 이것은 아직도 중요한 논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론적으로도 틀렸고 전략적으로도 멍청하다. 무엇이 더 나쁜지도 모르겠지만.”(188쪽)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에서 ‘타자’와 ‘변화’를 축으로 새로운 논의를 전개한다. 현재의 변화를 제대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전의 과거와 비교해야 한다. ‘상상된 공동체’인 민족 국가의 형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 유명한 개념에서 방점은 ‘상상’에 있다. 민족이라는 공동체는 ‘상상’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민족이 단지 허상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족은 허구의 개념인데도 우리를 현실적으로 규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개인들은 그냥 여성이기보다 한국 여성이고, 독일 남성이거나 팔레스타인 남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민족 규정은 불과 지난 20~30년 사이에 침식되었다. 민주주의적 국민국가에 동질성을 제공한 민족이 침식되면서, 동질 사회가 천천히 사라졌다. 즉 다원화 사회가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변화의 본질이다. 정체성의 혼란과 타자 혐오 사이에 있는 오늘날 ‘감소된’ 주체에 대한 날카로운 철학적 탐구 이졸데 카림이 ‘타자’를 말할 때, 이는 관용이나 환대라는 윤리학적 개념을 또다시 역설하는 것이 아니며, 자아와 타자를 둘러싼 기나긴 형이상학을 재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카림은 타자성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시내 어디에나 있는 케밥집, TV를 틀면 등장하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마트 계산대에서 마주치는 외국인 노동자에서 본다. 현재 우리는 길에서, 매체에서 ‘이방인’을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다. 이 이방인들은 ‘그들은 누구인가’만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다시 말해 나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이다. 『나와 타자들』은 정체성을 둘러싼 변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개인주의의 층위를 역사적으로 구분한다. 첫째, 19세기 국민국가가 형성될 때 기존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동등한 개인들이 처음 출현했다. 이것이 1세대 개인주의다. 둘째, 1960년대에 와서 정당과 같은 소속을 통한 운동이 각자의 정체성을 통한 개인의 운동으로 분화된다. ‘정체성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2세대 개인주의다. 그리고 세 번째가 지금의 다원화 사회에서 대두한 3세대 개인주의다. 1세대 개인주의에서 주체가 다른 존재로 변화했고, 2세대 개인주의에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주장했다면, 오늘날 주체는 ‘감소’된다. 다문화 속에서 ‘당연한’ 문화가 사라지며, 정상성을 규정했던 남성, 민족, 이성애자 주체가 헤게모니를 잃는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가 완전히 다르게 살 수 있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60쪽) 타자 혐오는 바로 이 ‘작아진 자아’가 취하는 방어 태세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적인 문제를 지역적으로 풀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때 다음과 같은 입장을 내세운다. 우리는 그 문제를 풀고 싶지 않다. 우리는 거부한다. 울타리를 치고, 장벽을 세우며, 철조망을 쳐서 변화의 반대편에 설 것이다. 이것은 외부적인 방어인 동시에 내면적인 방어다. 불안한 주체를 완전한 주체로 고정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장벽 뒤에서 옛날의 완전한 정체성은 배타적이고 폐쇄된 것으로 바뀌고 만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바꾸는 다원화 사회에 살고 있다. 돌아갈 방법은 없다.” ─ 본문 중에서 항상 알고 싶었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한 타자 혐오를 둘러싼 다섯 가지 쟁점 ① 영국의 유럽 연합(EU) 탈퇴에서 보듯, 오늘날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지 않은가? → 아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민족주의의 침식이다. “오늘날 유럽 연합에 대한 저항으로 등장하여 자기 자리를 재탈환하려는 민족은 다른 무언가가, 통합의 서사로부터 분열의 서사가 되었다. 지금의 민족 서사는 국민의 50퍼센트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민족 서사는 나머지 절반의 국민을 반대한다. 여전히 환상이 잘 작동하고 있었을 때 민족은 밖으로는 경계를 만들지만 내부는 결속시켰다. 그러나 영국의 사례는, 그러한 허구가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하는 곳에서 민족을 호출한다는 것은 내부의 분열을 지향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민족은 외부의 국경에서 내부의 경계로 변화했다.”(본문 30쪽) ② 이민자 혐오는 비록 올바르지는 않더라도, 현실적인 이유를 가진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전선이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 낯선 자를 받아들이기란 그토록 힘든 것이 맞다. 그러나 나와 타자들을 가르는 전선은 국경이 아니다. “전선은 원주민과 이민자 사이에 있지 않다. 정치 전선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정치 전선은 오늘날 포괄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과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다. 이민으로 변화된 이민 이후 사회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이민 이후의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후자는 변화를 위협으로 느끼고 ‘과도한 외국화’ 또는 이슬람화로 재해석하는 이들, 말하자면 변화를 막고 싶은 사람들이다. 현실에 대한 이러한 저항은 변화하지 않는 ‘진정하고 순수한’ 사회라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는 진실에 대한 거부와 부인이 힘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이는 위험한 힘이다. 현실을 자신들의 환상에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144쪽) ③ 진보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하여, 좌파 포퓰리즘으로 대응하는 것은 어떤가? → 그럴 수 없다. 이제 누구도 ‘가치’를 주입할 수 없다. “기본 가치는 논의될 수 없고 질문할 수도 없는, 고정되고 확정된 데다가 (바로 주도 문화처럼) 본질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가치에 대한 호소는 민주주의적 과정이 전혀 아니며, 대신 가치에 대한 복종이 주제가 된다. 이 복종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가치는 제공되어야 할까? 혹은 가치로 물을 들여야 할까? 이 논의의 주제는 재교육일까, 세뇌일까? 재기호화일까, 신념일까 아니면 유혹일까? 가치는 페티시처럼, 주술 기도처럼, 낯선 것들의 등장을 방어하기 위해 불려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