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왜 무굴 제국을 알아야 하는가?
인도를 지배한 마지막 거대 제국, 무굴.
세계를 압도한 찬란한 문명의 절정.
무굴 제국의 역사를 총망라한 국내 최초의 책!
오늘날 세계는 인도를 주목하고 있다. 세계 인구 1위, 빠르게 성장하는 주요 경제국 중 하나,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이자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균형을 이루는 외교 강국. 국제 안보와 경제 질서 재편의 중심에 인도가 있다. 그렇다면, 이 눈부신 도약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 해답은 무굴 제국에 있다.
이 책은 무굴의 시작부터 멸망까지를 다룬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통사다. 무굴 제국은 단순한 왕조가 아니다. 힌두교와 이슬람, 수많은 언어와 민족이 뒤섞인 광대한 대륙을 융합과 포용, 공존의 방식으로 통합하고 통치했던 거대한 정치 실험장이었다. 또한 세계 GDP의 약 4분의 1을 차지했던 초강대국, 세계 무역의 중심지이자 유럽보다 두 배 많은 인구, 유럽 3분의 1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 개혁과 혁신을 통해 확립한 강력한 행정 제도, 문화와 종교의 융합 속에서 꽃핀 정치·예술·사상의 황금기, 이 모든 것이 무굴 제국이었다. 무굴 제국은 인도가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유럽 열강이 동경했던 ‘황금의 땅’이었음을 보여 준다.
인도는 풍성한 인구와 자원을 바탕으로 17세기의 무굴 제국처럼 세계 경제의 선두권에 부상하고 있다. 무굴 제국을 들여다보면 인도라는 나라가 단순한 신흥 강국이 아닌, 찬란한 문명의 맥을 이은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 순간, 세계사는 더 이상 유럽의 독무대가 아니게 된다. 세계사의 축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 봄으로써 지금의 세계 질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세계사의 또 다른 중심이자 유럽이 동경했던 황금의 땅
황금과 피로 쓴 제국의 역사,
번영과 파멸이 교차하는 거대한 역사의 무대
무굴 제국은 1526년 중앙아시아 출신의 바부르가 인도를 정복하고 세운 이슬람 왕조로, 약 3세기 동안 세계 최고의 부를 일구어 번영을 누리다 1857년 막을 내렸다. 이 나라는 인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평가되지만, 사실 공식적으로 ‘무굴’이라는 국명을 사용한 적은 없다. ‘무굴’이라는 이름은 왕조를 세운 바부르와 그 후손이 속한 부족을 가리키는 말로, 몽골을 뜻하는 페르시아식 표현이다.
이 책은 무굴 제국의 정치와 외교는 물론, 종교와 문화, 예술, 국제 관계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전 생애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무굴 제국의 시작은 ‘세계의 정복자’ 칭기스 칸과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의 피의 정복에서 시작된다. 이후 악바르, 자항기르, 샤 자한, 알람기르로 이어지면서 17세기를 제국의 전성기로 인도한다. 이 시기의 무굴 제국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성기일 뿐만 아니라 영토 또한 사상 최대 판도를 기록하게 된다. 〈감수의 글〉에 따르면,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영향력 있는 인물이나 지배자, 기업계와 언론계의 거물을 ‘모굴Mogul’이라고 표기하게 된 것은 무굴 황제의 묵직한 존재감과 그들이 다스린 제국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다.
무굴 제국은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대제국이었다. 동시대 중국을 제외하면,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로 떠올랐으며, 그 번영의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50년대 인도로부터 강제로 헌납받아 현재 런던탑에 전시되어 있는 코흐누르(일명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전설로 남은 ‘공작 옥좌’만 보더라도 무굴 제국의 눈부신 부를 짐작할 수 있다. 코흐누르 다이아몬드는 당시 전 세계가 이틀 하고도 반나절을 쓸 값어치에 해당했고, 각종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이 옥좌는 무려 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무굴 제국이 이처럼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정학적 위치 덕분이었다. 중앙아시아와 중국, 멀리는 유럽을 잇는 비단길과 동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이어지는 해상 교역로의 중심에 위치한 무굴 제국은 교역과 무역의 요충지로서 풍요를 누렸다.
그 부를 바탕으로 무굴 황제들은 예술과 문학, 건축을 아낌없이 후원했고, 이는 곧 찬란한 문화적 전성기로 이어졌다. 특히 악바르 황제가 닦은 제국의 토대 위에서 자항기르와 샤 자한 황제는 무굴 예술과 건축을 한층 정교하고 세련된 형태로 꽃피웠다. 타지마할, 델리의 붉은 요새, 아그라 요새 등은 무굴 제국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걸작들이며, 오늘날까지도 그 찬란한 영광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하지만 알람기르 사후 유약한 황제들이 잇달아 즉위하여 제국의 행정과 통제는 드넓은 영토에 미치지 못하게 된 데다 섭정들이 황제보다 강력해지는 등 혼란에 빠졌고, 이런 상황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점차 광대한 인도 영토의 정복자이자 지배자로 진화하여 결국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기에 이르고 만다.
무굴 제국은 찬란한 황금과 피로 쓰인 대서사시이다. 번영과 파멸이 교차하는 거대한 역사의 무대, 그 중심에 무굴이 있었다.
융합과 포용, 공존의 방식으로
거대한 인도 대륙을 통일한 무굴 제국의 모든 것
같은 시기 강력한 이슬람 제국으로는 사파비 왕조와 오스만 제국이 있었지만, 무굴 제국이 이들과 뚜렷이 달랐던 점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종교적 간극이었다. 지배자는 이슬람을 따랐지만, 압도적 다수의 백성은 힌두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무굴 제국은 배척이 아닌 포용, 동화가 아닌 융합을 택했다. 힌두 전통과 페르시아 양식이 만난 무굴 세밀화, 이슬람 건축 위에 힌두 조형미가 더해진 웅대한 무굴 건축, 힌두교 경전과 대서사시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고, 음악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하려 한 시도들이 모두가 융합의 결과였다. 비록 이 문화가 기층까지 깊게 뿌리내리지는 못했지만, 다양한 언어와 종교, 문화가 느슨한 형태로 공존했던 무굴 제국의 유산은 이후 영국 식민 통치와 현대 인도 국가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무굴 제국은 단순한 과거의 제국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다름 속의 공존’이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충돌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무굴 제국의 실험은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