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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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나라에 관한 논쟁적인 책이 출간되었다. 『극장국가 북한: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North Korea: Beyond Charismatic Politics, 2012년 영어본으로 먼저 출간되고 이후 저자들이 직접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이자 냉전사 이론연구로 국제학계에서 기어츠상 등 굴지의 상을 수상해온 권헌익과,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이자 북한을 열차례 이상 방문하며 남북문화통합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해온 정병호가 북한 정치체제 유지의 미스터리를 밝히기 위해 5년여에 걸쳐 공동 작업한 연구의 결실이다. 이 책은 현 시기 북한에 관한 독보적인 연구성과이자 최고의 인류학적 분석으로 손색이 없다. 3대세습으로 들어선 북한의 정치체제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저자들은 이를 봉건왕조의 연장이 아니라 현대적 카리스마 정치의 발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북한에 관한 일면적 관측이 여전히 주를 이루는 한국사회에 새로운 논쟁을 던져주는 주제로서, 북한만이 아니라 21세기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다양한 상징세습권력의 출현이라는 현상을 분석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북한은 언제 그리고 왜 극장국가로 탈바꿈했는가 ‘극장국가’는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가 인도네시아 발리 네가라(Negara)의 사례를 통해 제시한 개념으로, 물리적 강제가 아닌 과시의 정치(화려한 의례와 공연)로 통치되는 국가를 통칭한다. 이 극장의 스포트라이트는 그 사회를 넘어 다른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지배권력의 힘에 맞춰져 있으며, 그로 인해 구성원들은 자신의 삶을 초자연적 질서로 받아들이게 된다. 저자들은 ‘극장국가’라는 문화인류학적 개념을 북한사회에 적용하여 북한의 상징체계와 예술정치를 분석하는 것이다. 북한은 건국 이래 국가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 20세기 초 항일무장투쟁의 기억을 끊임없이 자국의 역사에 포함시켜왔다. 이는 냉전시대의 다른 공산주의국가들의 시도와 일맥상통하지만, 이러한 혁명적 국가정치는 1989년 냉전 종식 이후 전세계에서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 단지 북한만이 예외다. 북한의 역사 새로 쓰기는 지도층의 권력유지 특히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세습과 밀접히 연관된다. 저자들은 그 역사가 단순한 서적의 형태를 넘어 음악과 연극 더 나아가 건축 양식의 형태로까지 증폭되어 생산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북한이 언제, 왜 극장국가 면모를 갖추게 되었는지를 밝혀내기 시작한다. 이 책의 제1장과 2장은 국가정치가 역사를 어떻게 발명해내 이를 문화예술 분야에 반영하는지를 다루는데, 저자들은 1994년 대국상(大國喪, 김일성의 사망) 이후 대대적으로 전개된 “추모와 그리움의 드라마”를 주의깊게 살핀다. 북한이 다양한 음악·연극 공연을 선보이고 대규모 건축에 열을 올리며 현대적 극장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시기가 곧 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가 한창 진행되던 때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의 제작배경은 매우 뚜렷하다. 2000년대 북한이 남한에도 문호를 개방하면서 많은 이들이 참관했던 아리랑축전(제2장)과 혁명렬사릉(제4장), 국제친선전람관(제5장) 등 대규모 스펙터클의 사례들 또한 모두 권력승계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아리랑축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축전은 북한이 외부세계에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 즉 북한 정치체제의 역사적 기원과 미래의 열망을 청소년과 시민-배우의 집단예술공연으로 보여주는 극적 장치, “예술과 정치의 첨예한 결합체”다. 아리랑축전은 북한의 극장국가 정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의 산물로서 북한이 권력을 매끄럽게 승계해내는 데 큰 몫을 해냈다. 이는 또한 공연에 참여한 시민들 스스로가 국가의 메시지를 몸짓과 목소리로 대변하는 과정에서 “일심단결”이라는 북한 고유의 상징이 그들의 정신과 의식에 스며드는 극장국가의 역학을 보여준다. 북한이 창조해낸 이와 같은 극장국가의 면모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고전적 테마, 즉 혁명적 카리스마의 필연적 종말에 정면으로 부딪친다. 카리스마 권력은 위기 시에 등장했다가 언젠가 일상의 질서로 돌아가면 서서히 사라져 전통적 권력이나 합리적-법적 권력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만다는 베버의 주장은 1989년 구사회주의권이 일제히 몰락하면서 여실히 증명된 바 있다. 그런데 북한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과연 이 극장국가적인 기제를 통해 카리스마의 운명을 진정 극복해낸 것일까. 극장국가 북한은 과연 무엇을 상영하고자 하는가 이 책의 제3장부터 5장까지는 각각 ‘두개의 권총 에피소드’ ‘사라진 전사자묘지들’ ‘김일성이 전세계로부터 받은 선물의 면면’ 등의 흥미롭고 다채로운 서사로 채워진다. 저자들의 체계적인 인류학 연구는 북한의 정보통제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문헌·영상·예술작품들을 토대로 그 통제의 벽에 균열을 내면서 내부의 면면을 드러내준다. 이 모든 에피소드들을 통해 결국 저자들이 던지는 물음은 하나로 모아진다. “진정 흥미로운 질문은, 그 이야기가 과연 진실인지 또는 얼마만큼 진실이 담겨 있는지가 아니라, 왜 그러한 요소들이 이야기에 도입되었는지 또 이 이야기는 이런 가공의 서사적 요소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다.” 북한은 과연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을까. 한편으로 보면 북한은 극장국가적 요소를 통해 감시와 처벌이라는 물리적 강제를 넘어서는 현대적 통치기술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과거 유교사회의 충과 효라는 덕목을 종합적으로 개편하여 카리스마 정치의 철학적 토대까지 마련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메시지의 숨은 뜻, 즉 북한은 왜 통치체제에서부터 시민들의 철학까지를 쉼없이 개혁해냈는가를 물어볼 차례다. 제3장 ‘총대’ 편은 그 숨은 뜻을 드러내주는 장으로, 김형직-김일성 부자의 ‘두 자루의 권총’ 일화와 김일성-김정일의 ‘한 자루의 권총’ 이야기를 들려주며 북한이 선군정치를 전면에 내세우게 된 과정을 차례로 풀어본다. 북한은 냉전종식 후에 스스로가 소련을 대신해 미국의 패권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적수가 되었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다른 국가들이 빠르게 경제우선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와중에도 홀로 ‘군사우선 사회주의’를 고집했다. 저자들이 보기에 ‘총대’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비단 국가안보만의 문제를 넘어 더욱 근본적인 문제, 즉 “무엇이 진정한 인간을 만들고 무엇이 윤리적 삶을 구성하며 어떻게 의미있는 정치적 삶을 사느냐”라는 철학적 문제에 가깝다. 이와 같은 철학의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북한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세습되는 과정을 준비했는지, 또 차질없이 이뤄내려고 했는가를 낱낱이 드러내준다. 권력세습에 관한 또다른 중요한 사례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체제의 핵심전통인 현지지도다. 이는 극장국가의 연출자가 몸소 변방으로 찾아가 시민을 만나는 방식으로, 김정일은 이를 “선군조선의 모든 기적의 근본원천”이라고 믿었다. 김일성 사후에 이 전통이 강화되면서 특히 그 순례지가 군사시설로 집중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는 곧 북한의 선군사상과 총대철학이라는 ‘현대적 통치철학’이 결국 ‘총대가문’ 즉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세습체제를 완강히 지켜내려는 처절한 노력의 일환이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북한의 정치·문화를 망라한 체계적 인류학 연구의 결실 1994년 이후 북한은 김일성의 사망과 대기근이라는 두가지 국가적 재앙에 맞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이 위기는 북한이 냉전과 사회주의권 몰락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특히 경제와 국방 중 무엇을 우위에 둘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을 내놓지 못하면서 생긴 결과다. 결국 “정치적 권력의 본성을 거스르는 인위적인 예술정치”가 맞닥뜨린 현실은, 식량위기에 이은 대규모 아사와 조선로동당의 권위 추락이었다(제6장 참조). 내부의 위기와 외부의 위협은 극장국가적 요소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하지만 그 강력한 드라마와 과시의 정치는 국가의 미래에 여전히 그늘을 드리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