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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once upon a time..’으로 막을 내렸지만, 동화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것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가 지나쳐 왔던 시대와 그 속에서 빛났던 그들을 비롯해 세월이 곁든 모든 것 그리고 이 동화를 기억할 방법은 끝났다고해서 결코 잊지 말고, 나만의 이야기로 새로 시작하는 것. 잊지마세요. 영화가 끝나고 비로소 시작된 동화의 나머지 몫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스포일러 없는 리뷰)느낀 점과 그 외 개봉 전, 몇 가지 참고할 사항들. 꼭 보기 전에 한번만 읽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스포 있는 짧은 리뷰)는 글 맨 아래에. . . 영화가 개봉하기 몇 달 전 부터, 이 영화에 대해서 오르고 내린 입소문에 공감을 합니다. 1969년, 겪어보지도 않았던 그 시대를 향한 향수가 느껴질 정도로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말에도, 반면 상영시간이 길게 느껴진다는 말에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심심치 않게 웃었고, 재현한 디테일에 놀랐으며, 통쾌함과 엔딩이 주는 여운까지 좋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은퇴까지 한편만을 남겨둔 이 감독이 꼭 만들어야만 했던 영화로 느껴졌습니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펄프 픽션>의 재림이라고 평합니다. 실제로 오프닝에서 타란티노 특유의 레터로 배우들의 이름이 올라가는 걸 보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 오프닝에서부터 영화는 우리를, 타란티노의 혹은 영화의 오랜 광팬이라는 전제 하에, 그 고전의 향수로 단숨에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영화를 따라갑니다. 발끝에서부터, 혹은 자동차 안에서. 함께 그 시절의 음악을 들으며. 사실 이 영화는 감히 예상하건대, <펄프 픽션> 말고도, 관객들 모두가 이 영화를 보고서 저마다 타란티노의 다른 영화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펄프 픽션>보다도 <재키 브라운>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이 둘 사이에 있는 영화라기엔, 이 영화가 추구하고 고집한 방식은 엄연히 다르지만) 이야기의 형식(특정 날짜나 시간을 알려주는 유사한 방식)이라기보단, 이야기의 흐름(혹은 천천히 쌓아가다 마지막에 폭발되는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조)에서도 <재키 브라운>과 흡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60년대. 반백년간 축적되어온 대중문화가 가진 그 색감이 가장 뚜렷했던 시절. 그리고 슬슬 새로운 전환점을 준비하던 시기의 분위기. 우습게도 낭만적인 터치도 가미된 영화라는 점에서 말이죠. 게다가 “재키 브라운”에 출연한 팜 그리어는 7,80년대 쏟아져 나왔던 3류 액션 영화에 주로 출연했던 배우였다는 점. 이는 한물간 서부영화의 배우인 릭 달튼과 연결지을 수도 있을거구요. 영화 속 주연들 중 거의 유일한 젊은이라고 말할 수 있는 브리짓 폰다가 주었던 히피의 느낌은 이 영화가 젊은이들을 대하는 방식들과 거의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재키 브라운”이 연상되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오프닝에서부터 은은하게 묻어나던걸요. 사실 <재키 브라운>은 몇몇 팬들 사이에서도 평이 엇갈리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정말 깔끔한 영화이지만, 유혈이 낭자함을 보고픈 기대를 배반한 영화이기도 하니까요. 특히나 전작이 <펄프 픽션>이었기에 둘을 비교해 에너지가 많이 줄어든 탓에 재미가 없어 실망하신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이 영화도 아마 그런 쪽에서 평이 갈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타란티노의 다른 오락영화들과 “재키 브라운”의 차이를 느끼셨다면, 그 차이는 이 영화에서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분명한건, <재키 브라운>은 팜 그리어의 영화나 B급 주류의 영화를 좋아하셨던 팬들을 위한 영화였던 것 처럼 이 영화 역시 영화 팬들을 위해 바치는 영화입니다. 그 말에는 영화광인 본인 스스로에게도 바치는 영화라는 문장이 담겨있습니다. <펄프 픽션> 속 트위스트를 추는 장면, <재키 브라운>에선 음악과 함께 전달되는 사랑의 감정처럼 이 영화에서 옛 향수의 낭만을 느끼게 해주는 장치는 영화 안에서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함께 웃는 관객들, 특히 배우들의 낭만입니다. 본인의 연기를 향해 웃어주고 최고라 말해주는 관객들에게 본인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후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람과 끝까지 버티게 해준 가슴 울리는 소중한 이유를 얻습니다. 이번 편에는 피가 낭자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다가도 찰스 맨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들었을 땐 “역시나”라는 반응을 많은 사람들이 개봉 전에 재밌게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다른 영화에 비해서는 유혈이 낭자하진 않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등급이 어떻게 내려질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나마 15세도 아니고 12세로도 가능한 건 아닐지 착각에 빠질 정도로. (하지만 역시나 착각이었습니다. 청불 등급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된 메인은 찰스 맨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옛 시대를 향해 빠져들게끔 길들인 공과 고전 영화에 대한 순수한 사랑, 열정까지 단번에 느껴질 정도로 많은 신경을 러닝타임의 상당수에 쏟아붓습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이 영화를 향해 타란티노 감독이 고전 영화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라는 평들이 많이 보인 듯합니다. 이야기꾼인 타란티노가 쓴 9번째 영화인 이 영화의 이야기는 물론 다른 영화들 만큼이나 복선이란 게 존재합니다. 하지만 다른 영화들에 비해 시간과 플롯을 꼬아놨다거나, 인물 관계도는 얽히고설키지 않고 훨씬 단순합니다. (이 영화의 모든 플롯이 시간의 흐름대로 흘러가진 않습니다. 불쑥 등장하는 제3의 인물의 내레이션도 영화의 매력에 한몫합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타란티노 본인에게, 특히나 영화광인 그에게, 꼭 필요했던 그리고 반드시 말해야만 했던, 만들어져야만 했던 영화입니다. 어떤 이는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조금은 정치적인 성향이 있다고 말하는 건 과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이 영화는 한 시대(혹은 한 여인)에 대한 러브레터임과 동시에 시대에 반항적인 히피(젊은이)들에게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영화계에 발을 담근 사람들이 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옛 향수를 그리워하거나 찬양하는 대신에 어느 순간부터, 옛 것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useless”라는 말에 주의해 주십시오.) 릭 달튼은 한물 간 스타입니다. 그의 스턴트 맨인 클리프도 자연스레 본인의 역할이 바뀝니다. 하지만 분명, 쓸모없다고 느껴지는 지점에서 이들은 무언가를 해냅니다. (“still work”이라는 의미에도 집중해 주십시오.) 더 정확히 말하면, 쓸모없는 건 없었습니다. 이는 여전히 유효한 경험이었거나, 시간일 테니까요. 또 다르게 풀어보자면, 지금 우리가 옛날 영화를 보고, 아님 옛날 음악을 들으며 촌스럽거나 식상하다고, 이제는 쓸모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지금의 영화와 음악의 스타일이 있기까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옛날의 것들이라는 걸 간과해선 안되지요. 영화던, 음악이든 시간을 받으며 발전해가는 (당연히 사람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는,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담겨진 시간들 중에선 그 무엇도 쓸모 없는 건 없습니다. 이제는 은퇴까지 한편만을 남겨둔 이 감독도 나이가 적지 않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남들보다 더 많은 경험을, 시간을 겪어왔습니다. 히피, 어린 반항아들, 참으로 철없어 보이기도 하는 젊은이들에게 시간과 경험의 연륜을 가진 이들이 옛 영화, 영화의 본질, 이 옛날 것들은 대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 그 방법은 동화입니다. 동화의 정의를 찾아보니, 어린이를 위하여 지은 것으로 대체로 공상적ㆍ서정적ㆍ교훈적인 내용을 담아 아이들의 동심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 또는 문예작품이라고 설명되어 있더군요. once upon a time..이라고 뻔뻔하고 다분히 동화적인 제목을 붙인 이 영화 (혹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들을 오마주한 제목. 영화에서도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의 영화가 중요합니다. 재밌는 방식으로 몇 번 언급을 하기도 하구요.)는 이렇게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영화는 이제는 쓸모없다고 느껴지던 옛 향수를 향한 여전한 사랑, 음악은 반항의 사운드트랙이 아닌 또 하나의 오락의 선집(選集), 눈물겹게 순수한 열정을 가득 담아 구시대 사람들이 젊은이들에게 영화의 동심을 일깨워주는 영화라고. 타란티노 영화에서 보여줬던 오락의 핵심은 피와 복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오락 옆에는, 항상 끝내주는 사운드트랙과 배우들의 끝내줬던 혼신의 연기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타란티노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영화만이 느낄 수 있는 영화라는 판타지에서 오락의 절정을 느끼게 해주는 탓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의 세계는 언제나 판타지, 혹은 수정주의에서 비롯된 허구를 바탕으로 한 다음, 그 무대 위를 마음껏 치달립니다. 그 동심의 순수함은 하얗고 때묻지 않은 순수라기보단, 장르의 오락의 그 깊은 원천에 집중하는 초심 혹은 원리를 기초로 합니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눈물은 모두 이 영화가 추구하는 영화의 동심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눈물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나 그 가슴 울리는 말을 어린 소녀의 속삭임에서부터 비롯된 점을 떠올리면 더욱 더. 그는 누구보다도 이 동화를 사랑합니다. 아마 저쪽 동네에서 이 동화를 사랑하기로 가장 소문난 사람일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이 동화의 진정한 동심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앞서 말했듯 그의 영화는 픽션이라는 점을 이용해 거침없이 그 동심의 레시피를 누구보다도 화끈하게 수행합니다.) 그리고 이 동화를 지키기를 원합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고 내리길 원합니다. 타란티노는 그저 괴짜 영화광, 과한 폭력성 등으로 비평가들에게 논란과 공격을 당하기 일쑤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어린 날부터 지금껏 본인이 즐겼던 영화들을 가져오고, 본인이 영화에 환호했던 점들을 우리들에게도 보여주고 함께 느끼고 싶어 합니다. 어린 날의 의미는 아마 영화에 빠지게 되었던 시점부터 적용될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의 장점이자 그 자체는 언제나, 논쟁과 토론의 대상입니다. 그 논쟁의 원천은 바로 영화의 동심에 맞닿아있습니다. 그리고 우린 그 논쟁에 참여하는 것, 관심을 갖는 것, 기쁨을 느끼는 것을 사랑하기에 영화라는 매체를, 동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날, 옛날 옛적 그 영화를 보며 자라면서 시작된 영화를 향한 파릇한 꿈을 꾸었던 지금 그는 이 영화가 시간이 흘러 고전으로 바뀔 그날, 미래의 어린, 젊은이들은 옛날 옛적으로 화자 될 이 영화를 보며 본인처럼 꿈을 꿔가길, 영화의 본된 동심을 느끼길 바란다는 점에서도 이 러브레터는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유효하겠습니다. 아마도 옛날 옛적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동화는 이 순수한 쾌락의 동심이 잊혀지지 않는 이상, 우리의 입에서 여전히 전해질 것입니다. 영화와 동화의 이야기는 절대 영원한 행복과 슬픔 속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영화의 막이 내리고, 동화의 문장은 마침표를 찍겠지만, 나머지 그 이후의 이야기를 머릿 속으로 그려나가고, 마음 속에서 이어가는 건 우리의 몫입니다. 영화나 동화의 관람을 끝내고서 자리잡지 못한 여운의 실마리들은 여전히 엉켜있지만, 엉킨 실들이 주는 감정들은 문학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기도 합니다. 만일, 영화나 동화의 유통기간이 그저 한번 보고 읽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지닌 여운들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내 마음 속에서 시작된다면 문학은 시간이 흘러서도 여전히 유효하겠죠. 이것은 또한 시간을 세긴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 역시 그들이 만들어 낸 이 동화가 끝나지 않길 기대하는 것이겠죠. 이 영화는 서서히 움직이다 이 픽션이 마침내 실화의 수평선에 맞닿으면, 그제서야 팽팽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연기의 앙상블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그 많은 스타들의 연기 호흡을 바라기엔,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아 실망할 것입니다.(배우들이 연기를 못했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다만, 긴 러닝타임에 비해 각각의 분량이 너무 짧게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호흡이 이루어지는 장면들은 잘 경험해보지 못했던 기가 막힌 감정의 여지를 안겨줄 것입니다.) 누군가는 지루할 수도, 다른 영화들에 비해 느낀 오락도 적어 실망할 사람도 있겠습니다. <장고>나 <바스터즈>에 환호했던 서스펜스를 기대하신다면, 어딘가 아쉬운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시원하게 달리는 <킬 빌>이나 혹은 <헤이트풀8>에서 보여줬던 피의 낭자나 복수의 쾌감도 그 정도의 기대를 미치기엔 어딘가 부족할 수도 있겠습니다. 단지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 감독 자신의 커리어에 꼭 필요했던, 그런 영화입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사려깊고, 순수하고, 곳곳에 열정과 애정이 묻어나는. 어쩌면 그의 영화는 마지막 한편을 남겨두고서야 다른 전환점을 맞이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때문에 그 팽팽함 이전까지는 그저 그 시대와 영화를 향한 사랑의 메시지를 보고 들으며, 그들의 발끝과 동선을 따라가다 어느새 할리우드에서 그냥 길을 잃어버리세요. 히피처럼. 왜냐하면, 이 영화는 젊은이들에게 영화의 동심을 알려주기 위해 만든 영화니까요. 젊은이가 되어버리세요. 하지만 끝내 돌아오세요. 끔찍할 줄만 알았던 이 이야기는 내 예상과 다르게 시대와 여인을 향한 헌정이 담긴 동화였고, 동화는 그 때와 멀어져버렸기에 그것이 이토록 가슴이 아려오는 이유일테니까요. 저는 동화의 끝에 펼쳐진 침묵의 순간(...) 무엇을 해야할지 깨달았습니다. 모든 동화에 담긴 이야기의 생명이 독자들에 의해서 이어갈 수만 있다면, 난 이 동화의 첫 장이자 마지막 장의 끝에서 느낀 애상적 여운과 내 안에서 다시 시작할 그들의 이야기들을 한가득 안은 채로 극장 밖을 나설 것이라고요. 그것이 우리가 지나쳐 왔던 시대와, 그 속에서 빛났던 그들과, 시간이 담긴 모든 것 그리고 앞으로 이 동화를 기억할 방법입니다. ps. 안토니오 마르게리티 이 이름 어디서 들어봤더라? 주옥같은 찰진 대사들 어떻게 번역했을지가 제일 궁금. (스포일러 포함) 저는 이 영화가 이 제목을 붙인 데는 두가지 이유가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앞서 말했듯, 영화계에 오랫동안 발을 담근 이들이 일깨워주는 방식을 동화로 비유했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마치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에게 동화를 들려주듯 말이죠. 영화에서 알려주고자 했던 동화는 1969년대라는 시대뿐만 아니라 관객과 배우, 감독이 영화를 통해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 경험들을 동심에 빗대어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영화가 표현하고 담아내는 것들에는 형식이 없기도 하지만, 마치 공장처럼 찍어내기도 했던 장르 영화들이 추구했던 가장 기본적이고 안전하면서도 기대하는 것들은 아마 이 동심과 맞닿아있을 겁니다. 때론 우린 화끈하게 터지는 걸 좋아하고, 극장 안에서 다른 관객들과 함께 마음껏 웃고 극장 밖을 나설 수 있기를 아마 가장 기대하지 않을까요? 관객과 더불어 영화 관계자, 발을 담군 모든 종사자들에게 존경을 보내는 동시에 영화의 동심은 지금보다도 그 옛날에 더욱 짙게 베어있었다는 걸 내심 그리워하고 있죠. 또 이 영화가 동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화의 결말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릭 달튼은 이웃집에 살고 있는 샤론 테이트를 만났습니다. 즉, 현실과는 동떨어진 영화만의 결말을 만든 것입니다. 때문에 이 영화는 현실이 아닌 동화, 영화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게 “once upon a time..”, 옛날 옛적 어느 날에 라는 이 문장은 동화의 첫 문장으로 등장합니다.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마지막에 그 문장(타이틀)이 올라옵니다. 마치 이제 시작이라도 하는 듯, 아님 여태껏 시작하지도 않은 듯. 조금은 아련한 음악이 흐르고 “once upon a time..”영화의 타이틀이 뜨면서 그제서야 이 영화가 동화임을 깨닫는 이유도 우리 모두 이 문장은 보통 동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문장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구도 이 영화가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겠죠. 그렇다면 이 동화의 진정한 시작은 영화가 끝난 후가 되겠네요. 샤론 테이트가 릭 달튼을 만났고, 그녀는 훗날에 자신의 남편인 로만 폴란스키에게 새로 만난 친구를 소개 시켜주겠지요. 그 날, 히피들과 있었던 일들을 풀면서 말이죠. 그렇게 앞으로 많은 일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것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정보를 알고 극장을 들어간 제가 이 영화가 예상과 달리 동화임에 한번 더 놀랐고, 다시 예상과 달리 이 동화는 시작하지도 않았음에 감탄한 이유였습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샤론 테이트라는 인물을 마치 동화 속 해피엔딩처럼, 이 영화, 동화에서만큼은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 해피엔딩을 접했음에도 여전히 한편으로는 씁쓸한 이유가 이것은 현실이 아님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타이틀이 뜨고서도 한참 동안이나 그들이 머물던 자리를 카메라는 비췄을까요? 그 후에 누군가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나 오랫동안 그들이 떠난 자리를 보여줬을까요? 그저 오래 여운을 간직하길 바라서는 아닐 겁니다. 대게 동화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이 나고 책을 덮습니다. “옛날 옛적 어느 날에”로 시작한 이 동화 속 그들에게 일어난 이야기들은 그렇게 끝납니다. 그들이 그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끝을 내버린다면, 그들의 이야기의 생명은 그렇게 식어버릴 겁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가 더욱 궁금한 독자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 속으로 계속 이어나가며, 설령 수백명의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된 그 동화의 뒷이야기가 수백개로 각각 다르겠지만, 동화는 그렇게 새 생명을 받으며 수명을 연장할 겁니다. 이 영화는 분명 관객의 마음 속에서 부디 그들의 이야기를 이어나가주길 바랄겁니다. 특히나 샤론 테이트, 그녀의 이야기를 말이죠. 다시 한번, 이 동화의 진정한 시작은 영화가 끝이 난 후입니다. 영화는 “once upon a time..”으로 막을 내렸지만, 동화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것은 이제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문장이 올라가고 우린 그들이 떠나고 남은 빈자리들을 오랫동안 보게 됩니다. 왜 아직 끝나지 않을까? 혹시 뭐가 더 남았을까? 이제 그들은 어떻게 될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린 그 뒷이야기들을 자연스레 상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그 장면마저 끝나고 극장 안에 불이 들어오면, 그제서야 우리는 깨닫습니다. 동화의 남은 부분들과 생명은 우리들의 마음을 따를 거라는걸요. 이 영화는 단순히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해피엔딩으로 끝난게 아닙니다. 관객들이 부디 이 동화를 이어가길 바라고, 이것은 그녀를 기억하게 만드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우리는 “once upon a time..”이라는 문구를 봤습니다. 그제서야 앞으로 이 동화가 시작할 거란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가 그 뒷이야기를 생각할수록, 이 동화의 생명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 안에는 동화 속에서만큼은 살아갈 샤론 테이트를 비롯해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들도 있겠죠. 그녀는 이제 앞으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게 될까요? 여러분은 이 동화를 어떻게 이어나갈 건가요? 영화가 끝나고 비로소 시작된 동화의 나머지 몫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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