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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 앞 매점에서 온갖 불량식품을 정복하고 다녔다. 그때는 단돈 1000원만 있으면 왕처럼 군림하며 사먹을 수 있었다. 친구들은 늘 돈 있는 애들에게 붙기 일쑤였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은 부모님께서 나에게 5000원을 주며 친구들 줄 과자까지 사라고 하셨다. 나는 냉큼 받아, 친구들에게 자랑했고 친구들은 나를 왕처럼 떠받들며 지나가는 과자 하나하나 구걸했던 게 생각이 난다. 1000원이던 5000원이던 돈만 있으면 친구들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돈이 다 떨어진 나에게 그런 식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전혀 없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돈은 자신 본연의 가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돈은 본연의 가치까지 만들 수 있는 큰 힘이 있었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의 한에서 말이다. 돈으로 선과 악까지 분별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민낯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영화 ‘야근수당’을 통해 조그만 단면이나마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영화는 보이스 오버된 성재의 목소리 위로 타이틀이 올라가며 포문을 연다. 아내와 통화를 한 후 성재는 바로 도로로 달려든다. 하지만 어수룩한 모습이 만연하다. 차 앞에서 자해공갈을 하고 부족한 연기를 하는 성재에게 일침을 가하는 용철은 성재의 철저한 조력자이다. 영화는 전개하는 내내 성재라는 평범한 사람이 자해공갈을 저지를 수 있게 하는 결정적 원동력으로 아내의 전화를 기용한다. 아내의 목소리는 성재에게 압박 그 자체로 다가온다. 더불어 은행에서 또한 전화가 오는 실정 때문에 압박은 더해간다. 개인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는 돈의 매정함은 곧 자본주의의 문제점인 듯 드러난다. 즉, 전화라는 것은 성재에게 자본주의의 압박 그 자체로 여겨진다. . 평범하고 선한 성재는 용철에게 사준 국밥 값을 내줄 돈이 없다. 국밥을 먹었지만 돈이 없다는 것은 엄연한 범죄기 때문에 성재는 어쩔 줄 몰라 한다. 하지만 용철은 이에 사족을 더한다. 성재의 상처를 국밥 집의 칼 때문이라고 위장하고 치료비까지 받게 된 것이다. 성재는 의아했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용철의 방법이 곧 정답이 된다. 그게 혹여 만연히 정의 내린 악일지라도 죄만 받지 않으면 된다. . 성재에게 계속해서 은행과 아내에게 전화가 오고 압박에 못 이겨, 결국 큰 건을 치를 준비를 한다. 그렇게 자해공갈을 위한 고의적 부상을 내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간 성재와 용철은 그 곳에서 돈을 갈취하는 학생들을 보게 된다. 학생들은 성재와 용철의 손에 있는 연장을 보고 달아나고 이때 용철은 한마디 덧붙인다. “완전 양아치네”라고 말이다. 미국의 철학자 리로이 존스는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에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는 말을 했다. 용철은 적어도 자신은 폭력을 사용하여 돈을 갈취하지는 않는다며 나름의 합리화를 자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화는 물고 물리는 꼬리잡기식이 되어 이내 곧 자본주의 사회의 만연한 행태로 드러난다. . 화장실에서 고의적 부상을 자행한 성재의 팔은 완벽히 부러졌다. 앞서 사망 보험금을 생각하던 그에게 팔이 부러진 고통이란 자본주의 속 돈 없는 삶과 같이 느껴진다.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고통 속 서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큰 건을 향해 가는 성재. 용철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성공 시 자신의 돈을 요구하며 해맑게 작전에 임한다. 성재는 용철의 신호를 고통 속에서 기다린다. 용철의 신호가 계시되자 도로로 이동하는 성재, 그러나 용철의 실수로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한다. 이에 성재의 얼굴은 한 것 상기되어 용철을 바라보는데, 클로즈업되어 흔들리는 카메라 속 성재와 상반되게 용철은 롱 샷과 더불어 완연한 대칭구조로 비춰진다. 이와 같은 대조적 양상은 고통 받는 성재가 멀쩡하게 지시를 내리는 용철에게서 느끼는 짙은 분노를 온전히 표현하고 있는 듯 보인다. . 다시 한 번 용철의 신호가 계시된다. 그러나 아내에게 전화가 오고, 성재는 작전을 이행하기보다 아내의 전화를 받기 급급하다. 아내는 사채 빚 사실을 결국 알게 되었고 성재에게 화내기 시작한다. 성재는 이제 절벽 끝으로 내몰린 상황이 된 것이다. 양심마저 저버리고 온전히 악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분노가 들끓는다. 이내 도로를 가로질러 달리는 성재. 하지만 차는 성재의 코앞으로 지나간다. 이에 용철은 성재에게 다가온다. 이때 배달 오토바이가 용철을 들이받게 되는 실제사고가 발생해버린다. . 용철은 빨리 가해자에게 가서 압박을 넣으라고 한다. 성재 자신에게 늘 압박을 가하는 아내와 은행처럼 말이다. 하지만 성재는 피를 토하는 용철에게 먼저 자신의 몫을 나누어줄 것을 약속받기 위해 힘쓴다. 앞서 보인, 멀쩡한 용철이 고통 속에 있는 자신에게 금전적 목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약속을 받은 성재는 이제 양심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욕을 섞어가며 심히 압박을 넣는다. 그러나 배달부는 성재의 부러진 팔이라도 부여잡으며 용서를 구한다. 성재에게 부러진 팔이란 자본주의의 삶 속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기에 배달부가 성재의 팔이라도 부여잡아 용서를 구걸하는 장면은 돈 없는 자들은 서로의 고통이라도 부여잡아야 사는 사회적 약자들의 안쓰러움으로 다가온다. 이는 벌어진 현 상황이 개인의 문제라기 보단 사회 구조적 문제가 크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 성재는 배달부의 구걸에도 꿋꿋이 압박을 가한다. 그러나 이내 곧 꿋꿋함은 흔들리게 된다. 배달부는 엄마와의 전화를 통해 자신이 놓인 실상을 알리게 되고, 성재는 배달부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물러설 때 없는 끝자락에 놓여있는 것을 알게 된다. 성재는 당황한다. 그리고 이내 머리를 쥐어 싸고는 힘들어 한다. 이때 쓰러져있는 용철과 배달부, 그리고 성재의 모습이 더치앵글로 화면에 잡힌다. 경사를 준 앵글은 정상적이지 않다. 즉 사고로 얽힌 인물들의 모습이 그렇게 보이는 만큼 자본주의 사회는 비정상적인 단면을 분명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내보인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두운 밤 속 끔찍하게 얽힌 사고 상을 밝게 비추어 주는 자동차 빔의 등장이다. 자동차는 자본주의 속 돈을 위한 자해공갈의 대상이 아닌 이러한 사회상을 고발하기 위한 용도로 바뀌어 등장했다. 이는 자동차의 시점으로 그들의 사고 상을 비추기에 더욱 소상히 자본주의의 참상을 알게 만든다. 즉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단면, 숨겨진 단면을 밝게 비추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 그렇다면 영화의 제목은 왜 ‘야근수당’일까. 실로 야근이란 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협한 제도이다. 따라서 자해공갈을 저질러도 돈만 번다면 야근수당의 정당성이 갖추어진다. 즉 어떤 방식이어도 돈만 벌면 합리성을 갖는 이 사회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선 또 어떤 ‘야근수당’들이 존재할까. 이 사회에선 삐끼나 매춘 또한 야근수당으로 치부되는 합리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엄연히 금지된 불법이지만 돈이 없으면 악인으로 정의 내리는 이 사회에서 개인의 잘못이라고만 규탄할 수 있을까. 오히려 선이 되기 위한 그들의 발버둥은 아닐까 하는 여러 방면에서의 이해와 더불어, 그에 따른 사회 구조적 규율의 생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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