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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구

이재구

5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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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st Wing

Series ・ 1999

Avg 4.4

1위 《소프라노스》 2위 《사인펠드》 3위 《환상특급》 4위 《올 인 더 패밀리》 5위 《M.A.S.H.》 6위 《메리 타일러 무어 쇼》 7위 《Mad Men》 8위 《치어스》 9위 《더 와이어》 10위 《웨스트 윙》 위 순위는 '미국 작가조합 선정 가장 잘 쓰여진 TV 시리즈'라는 리스트이다. 난 드라마를 종종 보긴 하지만 영화를 볼 때처럼 의무감에 휩싸여 동시대 이외의 작품들까지 챙겨보는 것은 아닌데 이 리스트에서 본 작품은 HBO의 그 유명한 시리즈 <소프라노스>와 <더 와이어> 뿐이다. 그 외에는< M.A.S.H.> 처럼 너무 오래된 작품인 관계로 굳이 찾아볼 마음이 들지 않는 작품들과 <매드맨>처럼 비교적 최근작이지만 순전히 손이 가지 않아서 보지 않은 작품들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웨스트윙>의 방영시기는 전자와 후자 사이에 위치한다. <웨스트윙>은 수많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방영 당시 에미, 골든글로브 등을 수없이 수상했는데 내가 웨스트윙을 최근 챙겨본 이유는 수상과는 무관하고 순전히 이것이 아론 소킨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소킨이 각본을 쓴 <소셜 네트워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였고 연출,편집,음악,연기가 두루 훌륭했지만 이 영화를 가장 빛나게 했던 요소는 각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온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그가 각본과 감독을 모두 맡았는데 그의 연출력이 그의 필력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그런 소킨이 집필한 각본이 무려 7개의 시즌과 154개의 에피소드에 담겨 있는 이 작품을 내가 더 일찍 찾아보지 않은 이유는 미국의 정치드라마가 나같은 외국인 시청자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 시즌을 감상하고 난 지금 돌이켜보면 감상 이전의 선입견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우선 <소셜 네트워크>에서와 마찬가지로 <웨스트윙>은 인물들이 핑퐁을 하듯 주고받는 대사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즐거운 작품이다. 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연설문에서 발췌한 문장처럼 유려하고 그들이 나누는 일상 대화에는 마치 시트콤같은 위트가 담겨있다. 왓챠의 자막은 (방영 당시의 것을 가져다 쓴 것인지 자체적으로 제작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원어로 이 작품을 감상하지 못하는 한국인 시청자들에게 원작의 감흥을 온전히 전달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영어 실력이 원어민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는 내가 보아도 5분에 하나씩 오역이 눈에 띄는 이 불량자막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시청자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반면에 다루는 이슈들이 미국 국내정치 위주이고 그마저도 20년 전의 것들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시공간에 사는 나로서는 현지인 시청자들과 같은 수준으로 이 작품을 감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극에 가끔씩 등장하는 국제 이슈들을 다루는 방식은 별로 사려깊지 못하다.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의 당황스러운 엔딩을 미국인 관객이 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아마도 <웨스트윙>을 본 인도인 시청자가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한다. 다만 훌륭한 스토리텔러인 소킨은 그의 매끄러운 혓바닥으로 시청자들이 무관심했을 법한 정치적 담론들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에 성공한다. 낙태, 동성애, 사형제도 등등 한국에서도 같은 논쟁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안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이 아니었다면 평생 쳐다볼 일도 없었을 오리건 주의 낙농업자들의 고충에 대한 이야기도 집중해서 듣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매 에피소드가 <썰전>이나 <강적들>같은 프로그램의 20년전 미국 버젼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드라마가 시사교양 프로그램 같다는 것은 단점이기도 하다. 웨스트윙의 인물들은 캐릭터가 아닌 논객처럼 느껴지며, 그들의 언변은 화려하지만 그 속이 궁금해지진 않는다. 현실 정치인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웨스트윙의 인물들은 표리가 너무나도 일치해서 문제다. 인물들이 가지는 개별적인 동기는 희미하며 그들 사이의 갈등은 회차를 넘기지 않고 해결된다. 마치 CSI 에서 회당 범죄사건 하나가 해결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을 정치드라마가 보여준다. 이에 비하면 방영 당시의 국내외 정세들에 관심이 없고 오직 픽션 안의 권모술수만이 존재했던 <하우스 오브 카드>의 세계보다도 권모술수가 거의 없는 <웨스트윙>의 세계가 더욱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자극적인 요소들을 배제했기 때문에 시청자들로 하여금 인물들 간의 사소한 스캔들이 아닌 거시적 비젼을 바라보게 만들 수 있었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라면 당연히 있을법한 수준의 악인조차도 등장하지 않는 이 드라마는 때때로 아이비리그 학생들의 모의국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