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끼나루

The Widow
Avg 3.1
(1)종종 '가능성을 발견합니다'라는 문구를 접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에 영화로 눈을 돌린다면 무엇이 있을까. 당신이 우연히 봤을지 모르는 박남옥의 영화 <미망인>은 이 가능성을 미묘한 지점으로 옮겨 놓는다. 1955년에 등장한 한국영화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혹은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당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박남옥 감독은 알다시피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이다. 아마, 이 글에 경유하게 된 당신이라면, <미망인>에 대한 여러 덧글들 가운데 이 전제를 먼저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미망인>이라는 영화를 발견했다는 안도감에 자칫 그 자리에 멈춰설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인들은 지금도 오래된 영화들을 찾아나서고 있다. 미처 21세기로 건너오지 못한 영화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당신은, 영화를 박물관에 보내선 안 된다. 혹은 당신만은, 이 사유를 멈춰선 안 된다. 영화 안에서도 걸음이 반복되듯이 <미망인>은 발견했다는 안도감과 별개로 머릿속에서 사유를 걷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이라는 ()안에 <미망인>을 가두지 않는 유일한 방어책이다. (2)<미망인>의 가능성은, 영화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있다. '불완전하다'와 '불완전하다는 사실'의 차이. 명백한 흔적. 영화의 후반부는 소리가 증발했으며, 나는 결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오로지 남아있는 스토리의 요약본만이 이 영화의 끝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 단절의 순간까지 영화와 함께 달려온 사람이라면 이 결말부의 쇼트가 어땠을지 무척이나 궁금할 것이다. 우회해서, 과연 나는 <미망인>을 '봤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볼 것이다'의 표현이 맞을까. 영화의 시간을 정지 시켜놓고 원하는 시간대에 얼마든지 영화를 재생시킬 수 있는 시대에 이것은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1) 붙잡아보고 싶다. 하지만(1-1) 없다. 영화가 하나의 육신 같은 것이라면 우린 일정부분의 육신이 도륙되어버린 영화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배워보지 못한 명제. 아주 간혹 다가오는 문제. 하지만 적지 않은 영화들이 실은 비명을 지르는 S.O.S 신호. 절단의 영화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 대한 가능성. (3)<미망인>을 보면서 당황하기 시작한 건, 영화를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화에서 잉여의 쇼트가 발견되고 잔여의 시간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급작스러운 여백. 어쩌면 여백이라기 보다는, '조금 긴' 것이라는 인상. 그런데 '조금 긴'이라는 것이 언어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박남옥 감독만의 감각이라는 것을 영화내내 느끼기 시작할 때, 내가 던져야 할 질문의 성질이 다소 달라질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왜 박남옥 감독은 장면마다 일종의 여지를 남겼는가. (4)<미망인>은 나에게 한 명의 한국영화감독을 상기케한다. 홍상수. 이상한 늘어짐. 분명 홍상수와는 다르게 쇼트가 다음 쇼트로 넘어갔는데도 함께 건너온 늘어짐. 대화 속에서 건드려지는 이중의 창. 이상한 개운함. (5)가장 기묘한 순간은 해변가에서, 신자와 주의 세계가 완전히 분리됐을 때다. 신자의 세계엔 주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진행된다. 완전히 무심한 상태에서 치뤄지는 자유의 순간. 시선의 차단. 결국, 객관식의 문제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쏟는 순간은, 당연히 그 바깥의 세계에 대해서 일정 무심한 상태다. 하지만 '시스템으로서의 모성'은 그 방향이 가족 바깥으로 향하는 순간 그녀를 '죄'의 기운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부재의 공간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그 순간 박남옥은 되려 신자를 '어머니'의 자리에서 분리시켜 놓는다. 아슬아슬한 베팅. 하지만 시나리오의 간결함이 영리하게 이 사고를 신파로 몰아가지 않는다. 뻔뻔할 정도의 간결함. 박남옥이 객관식을 벗어나는 방식. (6)"한국전쟁이 가져간 걸요." 진이와 택이가 재회하고, 그들의 회상도 영화에 끼어드는 반면에 신자의 회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이 가져간 남편. 여성이 아내와 동의어가 아니듯이, 남성도 남편과 동의어가 아니다. 한국전쟁이 가져간 것은 무엇인가. 남편, 아니면 그 남자. 신자와 그 남자와의 회상은 생략되어있지만, 그 한국전쟁이 갈라놓은 진이와 택이의 이별은 회상된다. 산 자들에게 주어지는 플래시백의 특권. 박남옥 감독이 두번째 영화를 찍었다면, 혹은 60년대로 넘어올 수 있었다면, '한국전쟁'은 또 어떻게 그려졌겠는가. (7)신자와 주의 관계는 영화가 진행되어가면서 포옹과 밀어냄을 반복한다. 그 사이에 놓인 택의 존재. 심지어 다른데가서 자라고 주를 쫓아내는 장면의 투쇼트는 어린아이와 성인의 관계라기보단 성년과 성년의 관계로 보인다. 한없이 작아보이는 주를,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신자와 나란히 놓을때 느껴지는 그로테스크함. (8)액자 속 그레타 가르보. 박남옥 감독은, 학창시절 <집 없는 천사>(1941, 최인규)에 출연한 김신재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여배우에 대한 소녀의 고백. 영화 안에서 개인적인 취향은 어떻게 은연중에 발휘되는가? 물론, 박남옥이 그레타 가르보를 좋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앨범 사이의 기호를 알아본 외계인들끼리의 묘한 수신호 같은 것. 박남옥 감독님, 당신은 그레타 가르보의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셨습니까? 하늘에 올려보낼 편지. (9)<미망인>은 사이사이마다 기묘한 반복이 존재한다. 이사장과 부인, 택이와 신자가 뒤엉키는 동선에서의 반복. 진이와 택이의 포옹과 엎드림이, 신자와 주 사이에서의 포옹과 신자 혼자서의 엎드림으로 반복될 때. 다른 공간(시간)에서 반복되는 순간들. 그리고 이사장 부인의 추격전을 신자가 재현할 때. 또는 신자의 발이, 택이의 발로 옮겨갈 때. 박남옥 감독은 어쩌면 본인의 영화에서 일종의 규칙을 쌓는 와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건 그것이 유일한 규칙과 예외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10)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신자가 택에게 칼을 겨눈다는 점이다. 어떤식으로 휘둘렀는지, 혹은 어떻게 찔렀는지는 알 수 없다.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건 분노의 춤사위. 내내 정적이었지만 산뜻했으며, 담백했지만 호쾌했던 그 영화가 그 광기를 어떻게 담았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영화가 그 순간 어떻게 변했을까. (11)반복. 분명한 건, 신자가 택에게 칼을 겨눈다는 점이다. 진이 아니라 택에게 겨누는 것. (12)대사 "피차간 뭐가 있어야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뭐, 이 년아?" "여잔 혼자 살아야 돈 벌어요." "극히 순수한 마음으로요." (13)41:05-41:07 (14)구로사와 아키라의 <들개>를 다시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