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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 지나치게 명확해 오히려 아쉽긴 하지만 이런 연출에 아이러니와 비극이라면 정말이지 사랑해 마지않을 수 없다. (※ 이하 스포주의) 숲과 과수원은 그저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잘 가꿔주면 제 기능을 하는 밝은 과수원이 되지만, 방치하면 마냥 어두운 숲으로 남고 만다. 이처럼 밝음과 어둠이 모두 공존하지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건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 과수원 현실의 공간이자 문제의 사건이 일어난 곳. 내내 밝은 이미지가 지배하지만, 인물 간의 관계와 심리는 미묘하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보이는 태식과 에스더와는 달리 구정은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구정은 에스더에게 마음이 있는 듯 보이고, 태식은 그런 구정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아는 것처럼 그려진다. 또한 구정은 그런 태식의 시선을 자꾸만 의식한다. 시선의 의미를 정확히 알진 못하나, 어쩐지 그런 태식을 대하는 구정의 태도는 묘하게 질투 혹은 열등감이 느껴진다. 소극적이고 겁이 많은 듯 그려지는 구정은 혼자만 '신뢰 테스트'에서 머뭇댄다. 결국 '속닥'이는 태식을 보면서 불신과 불안에 휩싸이고 만다. 이에 태식이 에스더에게 그랬던 것처럼 구정 역시 태식을 따라서 에스더의 모자를 날린다. 그리고 비극. 한편 태식과 에스더는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자두 씨를 뱉지만, 구식은 자두를 먹는 것조차 거부한다. 이처럼 구정은 자두 안의 씨처럼, 자신에게 내재한 커다란 열등감을 드러내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이처럼 과수원은 밝은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불신과 불안, 열등감, 경계심, 그리고 죽음이 지배한다. 2. 숲 어두운 이미지로 가득 한 숲은 꿈의 공간이다. 태식은 "찍을 수 있지?"라며, 어쩐지 구정을 무시한다. 이내 구정에겐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싹튼다. 숲에서 태식은 '자살'의 형태로 사고를 당한다. 이는 마치 태식의 죽음은 모자를 줏으러 간 태식이 자초한, '자살'과도 같은 사고였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 실제로 "숲에 오잖 건 너잖아", "의자를 가져온 건 에스더잖아"라며 구정은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기 바쁘다. 그러나 구정은 스스로도 자신의 잘못임을 안다. 녹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촬영을 했던 것이고, 모자를 날렸기 때문에 태식이 줏으러 갔던 것이다. 이런 자책감과 죄책감 속에서 구정 역시 자살을 시도한다. "왜 친구를 못 믿어"하고 소리치지만, 어쩌면 이는 자기에게 하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숲은 구정의 자책감과 죄책감, 열등감이 분출되는 공간이자 일종의 방어기제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동시에 숲은 어두운 분위기에도 아무도 죽지 않았을 뿐더러 서로에게 등을 맡길 수도 있는(신뢰 테스트) -과수원의 아이러니처럼- 희망과 신뢰의 공간으로 표현된다. 3. 속닥속닥 그러나 꿈에서 깬 구정을 기다리는 건 가혹한 현실이다. 태식은 죽었고, 그를 죽게 한 건 바로 '속닥속닥', 스스로가 만들어낸 열등감이었다. 밝은 과수원에서 죽음이 생겨난 것도, 어두운 숲에서 도리어 신뢰를 형성한 것도 모두 스스로의 문제였다. 누구에게나 자라나는 열등감의 '씨앗'을 어떻게 키울지는 자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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