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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린치는 21세기의 시작과 동시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로 디지털 시대에 대한 예언을 하기 전, 1997년에 '21세기 영화'가 무엇일지 〈로스트 하이웨이〉로 귀띔해주었다 (이 영화의 각본 첫 장에 '21세기 필름 느와르 공포영화'라 적혀있다!). 〈로스트 하이웨이〉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함께 얘기할 수 밖에 없는 영화다. 이 두 영화는 히치콕의 〈현기증〉의 변형으로 두 서사를 오가는 뫼비우스의 띠 형태를 지녔다. 같은 배우가 연기한 두 여자에 매혹되는 남자, 그리고 바뀌는 자아의 혼란이라는 미로에서 관객은 길을 잃고 헤멘다. 린치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미로에서 길을 잃도록 하고, 영화가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들었다. 방황과 그 질문은 둘 다 머리에서 시작한다. 두 영화 모두 충동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표지 Mulholland Dr.에서 보이는 Drive, 끝이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 위 질주하는 자동차의 Drive. 영어로 drive는 충동을 의미한다. 두 영화는 여기서 출발한다. 욕망이 만들어낸 미로. 〈로스트 하이웨이〉는 색소폰을 연주하는 뮤지션 프레드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아내를 의심한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몰래 있지 않을까 하는 악몽을 꾸며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프레드와 아내의 일상은 비디오테이프가 연달아 도착하며 엎어진다. 비디오테이프가 보여주는 공포의 이미지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과거로 돌변하며 프레드는 살인죄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대로 끝날줄 알았던 영화는 느닷없이 프레드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더니 아예 그 시점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때 우린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두번째 이야기가 1부 이야기의 역주행인 것을 깨닫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마지막 쇼트는 첫 쇼트와 일치해 비로소 뫼비우스 띠는 완성된다. 데이빗 린치의 이 영화가 '새로운' 것은 바로 이런 시네마틱함의 발견이다. 그는 두 이야기를 붙여 놓아 관객을 위한 '잃을 길'(Lost highway)을 마련하는 것이다. 실재, 결과를 알려주고 환상으로 들어가 원인을 엿보는 우리는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다시 결과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시작과 끝이 같은 것, 즉 끝남과 동시에 시작이라는 게 뫼비우스의 띠 아니었던가. 이런 구조를 살피기 위해 우리는 오프닝 시퀀스를 잇는 첫 쇼트부터 살펴야 한다. 담배를 피는 프레드의 모습, 이 쇼트는 처음엔 평범해보이지만 바로 다음 쇼트에서 거울에 비춰진 이미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즉, 데이빗 린치는 우리에게 귀띔해주는 것이다; 이 영화는 거울에 비춰진 이미지와 그 원래 이미지의 영화라고. 원래의 이미지와 거울의 이미지는 수평적으로 나열되기 때문에 처음 봤을 때 우린 어느것이 거울의 이미지이고 어느것이 실재의 이미지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한 번 보고 말할 수 없는 영화다). 다른듯 같은 두 이야기가 붙여짐으로서 1부에서 죽은 여자는 2부에서 되살아난다. 어디서 본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 우린 여기서 〈현기증〉을 떠올려야 한다. 죽은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매들린→주디의 서사를 따르는데, 여기선 역순이다. 서사의 앞뒤를 바꾼 린치는 현실로 시작해 환상을 보여주는데 끝에 매듭지어 결국 한 이야기로 귀결되게 하는 것이다. 나란히 붙여진 이미지와 거울이미지를 통해 두 여자는 한 여자가 된다. 이제 데이빗 린치가 마련한 미로에서 길을 잃어보자. 2부는 1부의 프레드가 만들어낸 환상일 것이다. 〈현기증〉에서 그랬듯이 금발의 매들린은 재현되어야 할 매혹, 어떤 이상과도 같은 이미지이며, 현실의 주디와 대비되는 존재이다. 〈로스트 하이웨이〉의 1부 르네는 갈색머리이고 2부 앨리스는 금발의 팜므 파탈이다. 이 뿐만 아니라, 1부의 남자는 부인과 관계에 실패하지만 2부의 남자는 경찰들이 언급할 정도로 르네와 연달아 관계를 갖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1부와 2부는 서로의 거울 같은 이미지다. 이건 어떤 은유적 의미로 쓰는 표현이 아니고, 정말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게 배치된 쇼트들이 연달아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1부에선 본 쇼트는 2부에서 다르게 반복된다. 1부와 2부에 모두 한번씩 등장하는 여자의 클로즈업을 떠올려보자. 전화할때 모두 눈과 입술을 비추는 클로즈업이 등장하고 관계를 가질 때 얼굴의 클로즈업이 등장하는데, 1부의 이미지는 두려움에 빠진 여인의 그것인 반면 2부의 이미지는 유혹하는 팜므 파탈의 그것이다. 이때 우린 클로즈업을 유심히 봐야한다. 이 영화의 순환적인 구조는 단순히 같은 쇼트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는 데서 기원하지 않는다. 클로즈업을 의도적으로 거울처럼 배치함으로서 시간을 무의미하게 느끼도록 한다. 도로가 보이는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 직전의 장면은 ('딕 로렌트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프레드의 모습과 차를 운전하는 프레드의 모습) 둘다 순전히 클로즈업 쇼트-역쇼트로만 이뤄진 쇼트다. 그런데, 이런 쇼트의 철저한 배치는 다른 쇼트로 대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린치가 클로즈업에 주목한 것은 이 쇼트의 속성과 연결된다고 본다. 들뢰즈는 클로즈업 쇼트를 두고 찍히는 대상을 기존의 시공간적 좌표로부터 추상화시키는 것이라 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린치는 이렇게 쇼트를 거울에 비추듯이 반복시켜 1부와 2부가 같은 같은 이야기임을 귀띔해준다. 이 관점을 영화의 시작은 충동에서 시작한다는 것과 연결시키면, 욕망의 환상이 영화를 지배한다는 것을 서사의 주체인 프레드와 피트에게서 볼 수 있다. 두 남자는 머리가 손상/붕괴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프레드는 머리에 상처가 있고, 환상을 이루는 피트 또한 머리에 의문의 상처가 있으며, 극의 인물들은 마치 관객에게 윙크하는 것처럼 꾸준히 그 상처를 언급한다. 즉, 〈로스트 하이웨이〉는 현실에서 욕망이 거부된 남자의 머리에서 나온 환상이다. 결국 이런 반복의 개념이 실재와 환상의 구분과 얽혀지므로 인물과 관객은 데자뷰를 경험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데자뷰가 무의식적 환상과 즉각적으로 맞닿았을 때 일어난다 했으며, 이것이 〈로스트 하이웨이〉의 흐름처럼 느껴진다. 관계에서 실패한 프레드의 실재계는 저항하는 상상계를 경유해 다시 실재계로 돌아온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말처럼 실재계로 돌아오기 전 앨리스가 '넌 나를 가질 수 없어'라고 한 대사는 상상계에서 타자(프레드)의 욕망이 전이된 피트로만 가능할 줄 알았던 것이다. 이의 연장에서 본다면 결국 다시 프레드가 된 남자에게 '미지의 남자'가 하는 대사는 지극히 친절한 것이다; "앨리스 누구? 그녀의 이름은 르네야! 그리고 넌 누구야? 너의 이름은 뭐냐고?" 여기서도 느껴지지만 그가 실재계와 상상계의 유일한 공통분모라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소위 '미스테리 맨'으로 불리는 이 남자는 결국 프레드의 무의식에서 나온 자아다. 그는 결국 실재계와 상상계가 만나는 지점, 즉 뫼비우스의 띠의 접점인 것이다. 그는 죽음의 충동 같은 존재이기에 그가 죽음의 사신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프레드는 이 사실을 '여자'(르네-앨리스)로부터 소유를 거부 당하고 깨닫는다. 앞에서 언급한 '친절한 대사'를 통해 깨닫은 프레드는 다음 장면에서 갑자기 시침 뚝 떼고 '미스테리 맨'과 손을 잡는다. 내재된 충동과 손을 잡고 임무를 달성한 남자는 결국 붕괴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프레드의 말을 떠올려보자. "난 비디오카메라를 싫어한다. 일이 일어난 그 자체보다 내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기 때문에" 그러나 그에게 내재된 죽음의 욕망은 카메라를 얼굴에 들이밀고 있다. 모든 사건의 시작은 카메라가 찍은 비디오테이프였다. 이 테이프와 카메라는 죽음의 충동이 현실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영화 속 영화'로 전이되는 매개체이다. 1부에서 시점 쇼트로 등장하는 순간들이 테이프에 보여지는 순간 린치는 이것에 대해 힌트를 준 셈이다. 그리고 이 힌트가 확정되는 순간은 2부에서 미스테리맨의 카메라 시점 쇼트를 보여줄 때이다 (이 시점 쇼트는 디지털 질감으로서 영화 내내 느껴지는 질감과 대비된다). 1부의 순간은 '실제' 프레드의 꿈 속 시점 쇼트였고 그것이 비디오 테이프에 보여지듯이 카메라의 시점 쇼트로 전이된 것이다. 린치는 카메라의 위력을, 영화의 무시무시함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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