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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도시 전문 역사학자인 주인공 운디네는 남자친구 크리스토프에게 이 명제를 모더니스트 건축의 대발견이라 설명한다. 나는 영화를 보다 이 표어에 꽂혀 자꾸만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고선 운디네의 설명을 아주 조금 비틀어 이 어려운 영화를 이해해보려 했다. ‘형식은 내용을 따른다.’(형식이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다) 90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영화에선 ‘반복’이 여러 차례 발생한다. 반복이란 어쩌면 이 영화가 제시하는 유일한 형식이다. 같은 장소에 출근해 같은 일을 하는 운디네의 일상은 반복이다(영화는 동일한 대사와 함께 이러한 장면을 두 번 이상 보여준다). 내가 탄 기차를 쫓아오는 바보 같은 롱디 남자친구의 행동도 반복이다. 직장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전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도, 민폐를 끼쳐 출입금지를 당한 카페에 누군가를 찾으러 들어가는 행동도 모두 두 번 이상 동일한 카메라 앵글로 포착되어 스크린에 박힌다. 이 영화의 포스터이기도 한, 두 주인공의 충격적인 걸음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두 번 찍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트가 제시하는 반복이라는 형식이 노골적이거나 적나라하다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형식은 내용을 따를 뿐, 내용을 앞서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내용은 운디네와 크리스토프의 사랑이야기다. 그들의 사랑이 필연적으로 반복이라는 형식을 만들었다. <타인의 삶>(2006)과 <작가미상>(2020)을 연출한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에 이어 독일 감독들이 연달아 영화의 ‘내러티브’를 향한 헌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했다. 2010년대에 들어 이미지와 형식과 음악과 그래픽에 의해 추방되었던 내러티브가 여전히 최우선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곳은 독일인 것 같다. 그렇다면 생각하자. Warum hier? 왜 독일인가? 역사학자라는 주인공의 직업을 통해 독일 현대사를 자꾸만 들춰보는 펫졸트 감독의 슬픔, 분노, 후회와 회한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가 만든 영화를 오늘 처음 본 내게 주어진 힌트는 많이 없지만, 나는 감독의 시선이 독일 분단 이전의, 2차 대전 발발 이전의, 20세기 초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향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나치당 집권 이전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남긴 위대한 유산 바우하우스Bauhaus에서 나는 사회주의 정신을 느낀다(바우하우스 박물관은 베를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모두(people)를 위한 간편한 디자인. 동시대 독일 좌파들의, 특히 영화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옹호는 폭력적인 경찰국가였던 동독을 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역사상 가장 선진적인 헌법을 가지고 사회주의 이상향을 그렸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로 옹호의 방향을 돌린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바우하우스의 선언은 자유주의 미국인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표백된 것이나, 운디네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다시 불러오면서 지금의 통일독일이 나치가 없었던 그때 그 곳으로, 사회주의 유토피아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작금의 네오나치Neonazismus 시대에 운디네의(감독의) 소망이 실현되기란 요원하다. 따라서 영화상 운디네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부서진다. 만일 사랑이라는 ‘내용’이 반복이라는 ‘형식’을 일으키는 것이 맞다면, 그 반복 속에서 역사는 어떻게 발전할까? 공교롭게도 역사의 발전, 삶의 전개는 형식의 바깥에서 일어난다. 영화 <운디네>에는 반복의 순간들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서 삐죽 튀어나와 논리와 과학이 사라진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조용하고 차분한 영화에서 감정의 급발진은 모두 그 순간들에서 일어난다. 형태와 형식조차 무력해지는 순간에, 논리와 과학이 설명을 포기하고야 마는 환상의 순간에, 가장 강력한 사랑의 힘들이 작동한다. 그 힘은 시간을 흐르게 하고, 역사가 진보하게 한다. 영화의 정수는 여전히 카메라에 있다는 것을 컴퓨터 그래픽의 시대에 다시 알게 해준 작품 <#운디네 >. 점프컷은 눈의 깜빡임이며, 카메라는 눈이라는 생체와 무척이나 같게 설계되어있으며, 영화는 결국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행위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성탄절에 다시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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