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이자 끝없는 탐구 대상이다. 중고등 학생 시절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학을 왜 갈 것인가?’ 이에 대해 ‘좋은 직업을 가지려고’라고 답하면, 다시 ‘좋은 직업을 왜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다시 ‘돈을 많이 벌려고’라고 답하면 이 대답에 또 꼬리를 물고 질문이 이어진다. ‘돈을 왜 많이 벌려고 하는가?’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행복하려고’라는 더 이상 재질문할 수 없는 궁극적인 답에 이르게 된다. 이렇듯 ‘행복’이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대다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그 행복의 정체가 무엇인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는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의 정체와 행복으로 가는 과정을 각자의 일생을 통해 탐구하여 밝혀내려 한다. 그 규명은 모두가 다르게 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남들과 비교하며 자신이 내린 답에도 확신하지 못하는 순간을 맞기도 한다. 행복 추구는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을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2300년 전에 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도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인지에 대한 영원한 숙제를 안고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도 같은 문제를 논하는 이 오래된 서적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알아보는 일은 흥미로운 탐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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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에우데모스 윤리학』, 『대윤리학』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3대 강의안에 속하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저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책을 집필한 기원전 4세기 중후반 그리스에서는 전통과 이성의 대립, 자연과 법의 대립 등 이전에 당연하게 여겨왔던 전통적 가치들이 도전받고 있었다. 전통적 가치를 논변이 불필요한 당연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논변을 통해 그 가치의 당위성을 증명해달라는 사회적 요구가 커진 것이다. 당대의 문학작품이나 속담이 도덕적 사유를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이후 많은 소피스트들이 이성으로 전통적 도덕 가치에 도전했다. 폴리스에서 가치의 혼란이 심해지고 있던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통적 도덕과 그것에 반발하는 도전적인 철학까지 통틀어 윤리적 사유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이 책을 통해 그 작업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당대의 도덕에 관한 모든 철학적 논변들을 집대성했으므로 이 책은 시대를 대표한 철학서로 평가되며, 서양철학사에서 ‘초석을 놓은’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pp.41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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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서는 ‘좋음과 행복’을, 제2권에서는 ‘탁월성과 중용’을 이야기하며, 제3권에서 ‘자발성과 책임’을 논하면서 제5권까지에 걸쳐 ‘여러 종류의 중용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제6권은 ‘지적 탁월성’, 제7권은 ‘자제력 없음과 즐거움’, 제8~9권은 ‘친애’에 관한 논변으로 되어 있으며, ‘즐거움과 관조적 삶’에 대한 제10권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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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이야기하는 핵심적 개념은 1~2권에 걸쳐 나오는 ‘행복’과 ‘탁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려면 그 행위가 지향하는 목적을 알아야 하고, 같은 원리로 인간의 삶을 잘 이해하려면 삶이 지향하는 목적을 잘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행복’ 개념이 제시된다. 삶의 ‘궁극 목적’이 ‘행복’이므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규명은 이 책이 맨 첫 장부터 해내야 할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행복[eudaimonia]’은 인간이 하는 행위를 보이지 않게 이끌어가는 ‘최고선’이자 ‘궁극 목표’로 정의된다. 또한 ‘행복’은 ‘잘 사는 것’과 ‘잘 행위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개념으로 이른바 내적, 외적 조건을 모두 충족되어야 완성되는 것이다. 인간이 ‘잘 행위하는 것’은 ‘인간만이 잘할 수 있는 행위’를 잘하여 ‘인간다움’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탁월성’ 개념이 등장한다. ‘탁월성’은 ‘무엇인가를 좋은 상태에 있게 하고, 그것의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게 하는 성질’이므로 인간이 ‘탁월성’을 지니면 인간 영혼이 좋은 품성상태를 갖게 되며 영혼의 고유한 기능이 발휘된다. 삶의 여러 면에서 ‘인간다움’을 발휘함으로써 성취되는 ‘탁월성’은 ‘성격적 탁월성’과 ‘사유의 탁월성’으로 나뉜다. 성격적 탁월성은 인간이 감정이나 외적 좋음, 사회적 삶 등과의 관계에서 ‘중용’을 유지하는 ‘합리적 선택’을 해내는 품성상태이며, 자신이 습관을 잘 들이는 노력을 통해 그 도덕적인 품성상태에 도달, 유지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 사유의 탁월성은 인간 영혼의 이성적 부분이 여러 가지 존재자들을 성찰하는 품성상태로, 좋은 가르침을 통해 성취할 수 있다. 이렇게 탁월성을 성취한다고 해도 행복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이 책에 따르면 탁월성 성취를 통해 행복의 ‘내적 조건’을 충족한다고 해도,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 등의 ‘외적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주관적 만족감이 아니라 누가 봐도 행복한 상태인 ‘객관적 행복’이 이 책에서 제시되는 ‘행복’ 개념의 특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노력 바깥에 있는 어쩔 수 없는 조건들을 인정해야 하고, 그러므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행복’에 가까워지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pp.425-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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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주장하는 객관적인 ‘행복[eudaimonia]’은 가장 인상적인 개념인 동시에 논쟁적인 개념이다. 통념적인 행복[happiness]의 개념은 쾌락, 명예, 부, 건강 등 다른 대상으로 대치되어 이해되기도 하고, 행복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 착안하여 ‘주관적 만족감’ 정도로 요약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행복’을 삶의 모든 면에서 최고로 ‘좋은 상태’에 있어야만 충족되는 사뭇 까다로운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좋은 상태’라 함은 ‘인간다움’이 최고로 발휘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사유나 행위’가 가장 ‘인간다운’ 것이고,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한’ 상태에 놓이게 할 수 있다. 예컨대, 어려운 철학적 사유를 오래 하는 사람을 보고 뭇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할 테지만 ‘인간다움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자신이 가난함에도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는 사람 역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와 행위를 했으므로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이 책에서는 이야기한다. 맛있는 것을 먹고 느끼는 황홀함이나 아무 생각 없이 편안히 잠을 자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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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행복[eudaimonia]’ 개념이 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적, 외적 조건이 모두 충족될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행복[eudaimonia]’을 정의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 이 책의 제10권 마지막 장에서는 ‘다중은 수치심이 아닌 두려움에 설복당하고, 각자의 즐거움만 추구하며 고귀하고 진정 즐거운 것들은 개념조차 모른다.’(378쪽)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또한, 사람들의 타고나는 품성상태에 따라 차별을 두기도 한다. ‘신적 본성을 타고난 사람은 가르침 없이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영혼이 고귀해질 준비가 된 사람은 가르침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며, 감정에 따라 사는 사람은 변화하도록 설득할 수도 없다.’(379쪽)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탁월한 품성상태를 갖도록 교육이 필요하고, 삶 전체에 관한 법률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이것의 적용 대상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로 한정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책을 쓸 당시에 독자로 고려했을 사람들은 폴리스 시민들이었을 것이다. 이때 ‘사람’의 개념은 지배층의 남성 정도로 한정되고, 여성이나 노예, 장애인 등 오늘날로 봤을 때는 당연히 ‘사람’에 속하는 존재들이 무시되었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류 전체가 아닌 일부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윤리학을 체계화했다면, 그 윤리학이 정말로 오늘날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한지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이는 이 책이 갖는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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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은 시대를 막론하고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다. ‘행복[eudaimonia]’은 삶의 모든 면에서의 좋음을 충족해야 이뤄지는데, 그렇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겉보기에 행복의 내적, 외적 조건을 갖췄다고 보이는 일부의 사람들 역시 한 요소의 결함만 있어도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행복[eudaimonia]’의 특성에는 궁극성, 포괄성 외에 ‘전 생애에 걸쳐 발휘되어야 한다’는 ‘지속성’도 있다. 쉽게 말해, 어떤 이가 일시적으로 행복의 모든 조건을 충족했다고 하더라도 말년에 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쇠퇴한다면 그 사람의 생애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려지는 것이다. 이 책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행복을 적용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신적인’ 수준의 완벽함으로 행복을 정의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지 않은’ 상태로 놓이게 함으로써 평등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이 책의 ‘행복[eudaimonia]’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 가능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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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현실에서 각자에게 주어지는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이 책의 주장은 현실 적용 가능성을 높인다. 이른바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세습되는 빈부는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 역시 이 책의 관점에서는 ‘주어지는 것’이다. 이 책은 각자에게 주어지는 한계의 차이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 내에서 최선을 다해 인간다움을 발휘하도록 권장한다. 물론 개인에게 주어진 한계가 너무 커서 불평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한계를 이유로 포기한다면, 인간다움을 발휘할 앞으로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 반대로 한계를 수용하고 노력한다면, 그 이후로는 인생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가능성이 조금씩 커지게 된다. 중세에는 현실의 완전한 행복이 불가능하므로 죽음 이후의 삶에서 완전한 행복을 달성하고 현실의 삶을 내려놓는 사상이 세상을 지배하기도 했다. 반면 현대에는 오히려 현실의 삶에 더 관심이 많으므로 이 책이 내세우는 주장이 더 유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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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적용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책이다. 지금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싶어질 때, 이 책은 ‘당신은 행복하지 않다’라고 말할 것이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당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도 행복하지 않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에 가까워지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이라고 결론지을 것이다. 노력은 탁월성의 성취를 위한 ‘인간다움’의 도야로써 할 수 있다. 감정 면에서 용기, 절제, 온화, 외적 좋음의 면에서 자유인답고 통이 큰 품성상태, 사회적 삶에서 진실성, 친절, 재치가 있으며, 이들은 ‘중용’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외에 주어지는 상황에 맞는 중용을 잘 파악하여 그 상태를 성취, 유지함으로써 현대인들 역시 인간다운 삶을 이루고 ‘행복’을 향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 ‘워라밸[work-life balance]’ 역시 일과 개인의 삶 사이의 중심을 잡으려는 삶의 자세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현대의 ‘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중용을 발굴하여 인간다움을 성취할 여러 방법을 추가한다면, 인간이 인간다워질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다. 또한 좋은 가르침을 구하고 사유를 지속함으로써도 인간다움을 성취할 수 있다. 이렇게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현실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행복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독려함으로써 현대 적용 가능성을 충분히 갖게 된다.
(2020.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