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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코 흐를 뿐이다. 어딘가에 희미하게 유형화된 현상이 있어, 평소대로 그를 내 감각수용체로 맞아들이고 싶다. 그러나 내가 시각을 택해서 볼 수가 없고, 귀를 택해서 들을 수가 없는 객체화된 현상이다. 무엇으로 저 암흑 같은 빛을 잡아낼 수 있을까. 이곳, 또 다른 나를 설명할 소우주에는 다름 아닌 '무의식'이란 고요한 감각기관이 지배한다. 영화계에서는 '식스 센스'라고도 접해 봤던 그 지각력이다. '무의식'이라는 감각에는 시신경, 청신경과 같은 신경 물질도 없다. '무의식'은 나도 모르는 나의 경험들 위를 사공이 노를 젓듯이 잠자코 흐를 뿐이며, 경험의 바다에 물결파를 생성할 고독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뿐이다. '무의식'은 나와 내 안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어줄 절대적인 감각기관으로 일컬을 수 있는 점이다. 소설을 직접적으로 관통하는 매개체가 바로 이 '무의식', 또는 '영혼'이다. 최면술사 오팔로부터 퇴행 최면의 첫 피실험자가 된 주인공 르네가 영웅담 못지않은 서사를 무모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던 수단이 되었던 '무의식'.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첫 페이지부터 과감한 무대 장악력을 오팔을 통해 선보인다. 점점 무의식으로 빠져드는 르네가 내뱉는 독백을 되뇌다 보면 그가 겪는 최면, 아니 그 이상의 애매모호함을 같이 경험하게 되면서 소설의 진가가 벌써부터 다가오는 맛을 느끼게 된다. 소설 <기억>을 접하는 첫 순간이 이럴진대, 나름 그 신선한 소재 즉, '전생'까지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전생을 겪고 왔다는 소설 밖의 비범한 이야기들이 갖가지 떠오른다. 그 이야기들을 집대성하고도 남을 만큼의 재미가 이 건방지고 훌륭한 프랑스 작가 선생의 필력으로 한껏 배가 될 것이라고 기대도 해 본다. 그러나, '전생을 다룬 이야기엔 재미가 가득하다.'라는 괜한 명제를 아무 때에나 세우진 말 걸. 베르베르가 굳건하게 독자들에게 어필하려고 했던 내용은 예상과 다르게 완전히 뒤바뀐다. 오락적 즐거움을 선사하려는 소설의 재미도 어느 정도 타겟팅되지만, 베르베르는 자간 곳곳에 인간이 부디 알아야 할 '필연'을 진중하게 강조한다. 작중 평범한 주인공들인 르네와 오팔에게 여러 시련을 닥치게 하는 원인이자, 그들이 서서히 깨달아가는 영적 무게중심이 모두 필연성에 놓여 있음을 소설 후반부에서 독자인 나도 비로소 알게 된다. 다시 말해서, 베르베르는 최면이나 무의식이라는 소재로 결코 가볍지 않은 필연의 철학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베르베르는 결코 단순한 오락거리 요소로서 요술지팡이를 휘두르지 않는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최면에 빠진 경험을 고백한 작가가 피력하고자 하는 '필연'을 우리 독자들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휴식을 취하며 오팔과 재미 삼아 <의자와 무관하게>를 하다 보면 그의 머릿속은 끈질긴 질문으로 다시 복잡해진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가?'" - 그렇다면 베르베르가 '필연'의 속성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 그의 해답은 하나의 중추 영혼이 아우르는 수백 번의 생명력을 잇는 힘을 필연으로 설명한다. 작중 르네가 자가 퇴행 최면으로 만나는 수많은 전생의 인연들이 있다. 이폴리트, 레옹틴, 샨티, 제노, 야마모토, 피룬 등 인류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은 모두 현생의 르네가 지니고 있는 영혼을 공통으로 말미암았던 전생들이다. 거꾸로 짚어보면, 숱한 전생들로 이어져 오던 공통분모 영혼이 112번째 육체인 르네에게 머물게 되었다는 진귀한 설정이다. 그런데 여기, 윤회의 기로에서 영혼은 단순한 취사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전 생의 육체가 죽어 또 다른 육체로 옮겨 가야 하는 영혼에게는 나름의 질서와 법칙이 있다. 이전 생의 육체가 결국 못다 이룬 꿈, 질긴 생명력의 관성에 맞서지 못해 답습조차 할 수 없던 이상의 모습을 다음 생에서는 필히 구현할 힘, 바로 필연이다. 일생 동안 다이묘에게 복종만 하고 살던 야마모토가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던 샨티로 환생하게 될 때, 대신 유쾌한 순간이 많지 못했던 샨티가 재치 있는 악사 조반니로 환생하게 될 때, 섬세하고 감각적인 인물이 되어 보고 싶던 조반니가 화려한 왕궁 생활을 누렸던 파티마로 환생하게 될 때,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이 유한한 생명력으로 발현되는 이 모든 환생의 의미를 채워 줄 때 언제나 필연이 개입된다. 이를 깨달은 르네가 자신의 전생들을 무의식 속으로 모두 불러 모아 설파하는 대목은 소설 내 가장 탁월하고 영험한 서사를 보여 주기도 한다. 베르베르는 이 필연이라는 영험한 덕목을 조심히 다루고자 한다. 마치 소망만 한다면 반드시 내생에서 이뤄지는 요술지팡이가 아닌, 한 줄기의 영혼이 조금 더 고상해질 수 있도록 자중한 물음을 던지는 회초리를 건넨다. '너는 너의 재능을 어떻게 썼느냐?' 필연은 꿈같은 내생을 위한 초석을 다지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살아온 현생을 감사한 삶으로 받아들이게끔 삶의 마지막에서 숭고한 채찍질을 휘두른다. " 태어나기 전에 우리 모두는 전생을 살았던 전임자로부터 일종의 유산을 물려받았어요. ... 그리고 각자의 삶의 마지막에 가서는 이런 질문에 맞닥뜨리게 돼요. '너는 너의 재능을 어떻게 썼느냐?'" -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는 소설 속 작가의 의중은 결코 운명론적 접근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필연으로 물려받는 전생의 유산들을 능동적으로 성장시켜 나가야 함이 현생에 부여된 의무이다. 소설에는 르네의 첫 번째 전생으로 아틀란티스인 '게브'가 등장한다. (등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르네에 버금가는 소설 속 핵심 인물이다.) 우리는 흔히 유토피아의 전형으로 아틀란티스를 떠올리곤 한다. 아틀란티스에서는 사유재산의 개념이 없지만, 모든 아틀란티스인들은 각자가 원하는 직업과 생활방식으로 매우 유복한 삶을 누린다. 자연과 인간 속을 동시에 흐르는 생명 에너지 '루아흐'가 있어 대지와 아틀란티스인들의 생활공간은 위험 요소 없이 대단히 안정적인 사회시스템을 자랑한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지혜가 그들에겐 익숙한 사고방식이 되며, 그들이 영유하고 있는 자원들은 결코 마르지 않을 신의 샘물과도 같다. 그러나 베르베르는 영원히 지혜로울 것만 같던 그들에게조차 인간적인 한계성을 과감히 부여한다. 아틀란티스인 게브가 자신들의 유한한 속성을 수천 년이 지난 미래의 평범한 후손인 르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는 설정까지 서슴없다. 이미 아틀란티스의 종말을 익히 알고 있는 르네로부터 '노아의 방주'를 설계하는 방법을 배운다거나, 방주를 타고 새로 정착한 대륙에서 원주민들을 교화할 종교와 치안 제도를 수립할 때에도 언제나 르네에게 충실하다. 소설은 르네와 게브의 시각을 번갈아 가는 입체구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영혼의 줄기가 처음 시작되는 '게브'와 마지막 현생의 모습인 '르네'가 마주하며 마치 그 줄기가 원형을 띠게 되는 형상을 유도한다. 그 형상을 토대로 위의 내용처럼 게브가 르네에게 도움을 얻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대화는 영혼의 지속성과 능동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두 인격체 사이에 유구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영혼이라는 강인한 매개체로 역사를 보호하려는 동존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이 대화를 주도하고 역사를 대중에 올바르게 이해시키려는 주체는 현생인 르네가 되고 말이다. 사실 르네는 바로 이전의 전생인 피룬이 바라던 삶으로서, 그도 어쩔 수 없는 필연의 산물일 법하다. 피룬은 생전에 역사를 올바로 기억할 수 있는 수단이나 환경을 갖추지 못해 이를 소망하며 살아왔고, 때문에 르네는 역사 선생이자 자가 퇴행 최면이 가능한 선후천적 지위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그러한 본인 지위를 정확히 이해하고 활용하는 일은 필연이 아닌 오직 르네 자신으로부터 나타난 '자유의지'의 역할이다. 르네는 게브로 하여금 아틀란티스의 역사를 증명할 파피루스 기록물을 남겨 놓도록 주문한다. 르네 자신은 그동안 살인죄 용의자 또는 정신질환 환자로서 매우 불편한 상황에 직면해 있음에도 상황을 타개할 정신은 아주 명약관화하다. 온갖 악재로부터 벗어나고서도 파피루스 기록물을 숨길만한 장소를 찾아내는 데에 목적의식 또한 뚜렷하다. 그가 퇴행 최면 영역에 들어서거나 올바른 역사관을 지니게 된 필연은 도구적인 뒷받침이 되면서, 만천하에 숨겨진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려는 일련의 행동력은 자유의지에 전적으로 말미암는다. 사실 이 소설의 끝에서 약속했던 파피루스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결말을 가지고서 자유의지의 애로사항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대중적 관심을 받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피상적 새드엔딩이 소설 후반에 걸쳐 있으나, 이는 또 하나의 모험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르네와 오팔을 비롯한 여행자들은 어디선가 다시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파피루스의 흔적을 찾아 새로운 여정에 오른다. 그들의 나침반은 전혀 고장 나지 않았으며, 그동안 이어져 왔던 자유의지의 능동성에 제동을 걸지도 않는다. 보트의 엔진은 계속 작동할 것이다. 오직 지대한 역사를 기억으로 잠시 남겨두면서 장중한 쉼표만을 찍을 뿐이다. " 나는 모든 것이 미리 쓰여 있다고 믿지 않아요. 자유 의지의 힘을 믿죠. 아직 113번 문 뒤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 순간에도 게브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요. 그걸 누가 알겠어요?" - 필연이 자유의지로 완성되는 이 역설이 소설책의 지적 무게를 더하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소설 <기억>에서 최면으로부터 시작한 여정을 통해 거대한 역사관 하나를 남겨놓고자 한다. 소설을 통틀어 작가는 역사는 권력을 쥔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쓰인 노략질의 한 부분일 수 있음을 귀띔한다. 우리가 아는 역사가 진실이 아닌 하나의 주장이며, 역사의 한 문단을 집필한 펜촉의 권위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함을 주장한다. 역사를 배우는 후손들은 각자의 전생에서 이루지 못했던 바, 즉 과거의 궁핍이 어떠한 내용이었는지를 궁금해해야 하며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역사적 사건과 설명들을 되짚어 볼 줄 알아야 함을 말이다. 비통한 소식들이 끊이지 않는 지금이다. 그러나 무자비한 전쟁과 살상, 독재, 비인간적 노예제, 신분제, 그리고 예방법이 전무한 전염병과 높은 영유아 사망률을 보여 주던 암울한 과거 인류사의 집합들이 소망했던 삶은 바로 지금의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과거 인간들이 염원했던 삶의 형태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다면, 과거의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의 미래를 총명하게 빚어 줄 자유의지가 동시에 우리에게 있어야만 한다. 역사를 기억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 놓을 보트에 독자들이 올바른 역사를 기술할 동행자로서 같이 올라탈 수 있기를. 르네와 오팔, 베르나르가 간절히 그렇게 소망한다. " 아들아, 전쟁은, 실제 전쟁은 말이야, 정말로 끔찍한 것이란다. 서로 알지도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끼리 죽고 죽이는 게 전쟁의 추악한 실체란다. 전쟁은 전쟁터에서 끝나지 않아. ... 전쟁은 아름다운 것도 감동적인 것도 아니야. 그런데도 역사는 전쟁과 전투를 가장 많이 기억하지. 안타까운 일이야. 나는 기쁘고 행복한 순간들이 기록되는 역사를 보고 싶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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