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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물을 좋아해서 영화를 안 좋아하면서도 좀비물은 몇 편 봤는데, 그 중에 여자 입장에서 아포칼립스를 서술한 작품이 있었던가. 단순한 전사 캐릭터, 아니면 남성들이 지배 구조를 재정립하는 동안 '대응하여' 변하는 여성상이 부수적으로 그려진 걸 본 기억 밖에 없네. 여성이 겪는 아포칼립스는 남성이 겪는 것과 매우 다를 것이고, 사회 구조가 흔들릴 때 정체성이 더 크게 흔들릴 존재가 겪는 변화가 알파 메일이 겪는 변화를 서술하는 것보다 재미있을 수 밖에 없다는 건 생각해 보니 너무 당연한데. 이 영화는 여성이 겪는 아포칼립스에서 남성의 위치에 대해 상상이 가능한 존재에게만 열리는 장르가 아닐까. 아포칼립스에서 남성은 이전 공동체의 구성원이자 미래의 공동체의 잠재적 구성원이지만, 눈 앞에 나타날까봐 가장 불안한 존재이기도 하다. 불청객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 여자 목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본인의 성대에 대한 공포를 남성 관객들이 이해할까. (그 문을 두드린 순간이 초콜렛을 가지고 싸우고 있던 순간인 것도 좋았다)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라고 쉽게 입모아 말하는 남자들이 '그렇지 않은 모든 남자'이며 동시에 '예외적 남자'일 수 있는, 양면을 동시에 가진 존재를 마주했을 때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남자'의 스탠스를 놓지 않기를 바라면서 건네고 싶지 않은 인간의 언어를 건네는 위태한 줄다리기, 여성이라면 누구나 해봤을 일상적 경험의 극대화를 그들이 받아 읽을 수 있을까. 여성 감독이 아니면 그 장면은 '확실한 경계 테세'에서 '몸싸움'으로 단조롭게 넘어갔을 것이고, 그 사이에서 흔들렸던, 제각기 다른 길이의 파장을 가진 요동들은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스포) 넬이 이바를 떠났다가 돌아올 때 '나는 자매를 떠날 수 없어'라는 감각, 소중한 기름을 써서 한 일이 가족끼리 찍은 비디오를 틀어서 본 일인 것, 강간 장면에서 카메라가 가야 할 곳, 자매끼리 살을 맞대고 자는 장면, 그리고 아이를 낳는 설정까지, 자매를 가진 자로서 다 좋았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뭔데', '그래도 자매는 귀엽고 예쁘다'라는 남자들의 감상평 오만개 나온다.ㅎ (그리고 언니 캐릭터에 대해서는 더도 덜도 아니고 그저 '짜증나는', '이해할 수 없는' 여자라는 평들도.ㅎ) (스포) 아이를 낳은 행위를 가부장의 존재의 일부 수용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에 결말에서 왜 자매가 아이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불을 지르는지 이해 못 하고 '개연성없다'는 평을 내놨을 남자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는 누웠다가 벌떡 일어났다. 성폭력 피해의 고통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출산이 가부장제와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여성의 주체적 경험이라는 것을 놀랍도록 단호하게 납득한 어머니가 ('아기 얼굴을 보면 가해자가 생각나지 않겠냐'는 세간의 통념을 깨고, 굳이 그 아이를 'she'라고 부르려는 동생을 저지하며) '이 아기는 씩씩한 남자 아기일 거야'라고 예언하게 한 영화를 에코페미니즘 영화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다음에는 아포칼립스에서 파마컬쳐로 이어지는 에코페미니즘 아포칼립스물도 보고 싶다는 작은 바람... 서울을 배경으로 한 한국형 여성 좀비물도 보고 싶고.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여성 아포칼립스물에는 굳이 좀비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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