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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있다. 누구나 자기 삶만큼 보는 것이다 - 정희진 이란 영화를 본다는 건 알에서 깨어 처음 마주친 어미새와의 만남같다. 갈색의 차도르를 두른 어미는 문화와 율법을 물어다 주고 어린 짐승은 그걸 의심없이 받아 삼키는 거니까. 그간 파라디의 영화들은 기댈 곳 없는 세계관에서 허둥지둥 어미를 쫓다 딜레마의 수렁에 빠지는 여정이었다. 허나 오늘은 중간에 서서 더 갈수가 없었다. 뒤에 벌어진 영화 속 일들을 눈으로 쫓긴 했지만 서양의 희곡과 누군가의 딱한 신세가 등치되고 학교에서 가르치던 어느 소설과 맞물려서 보편적인 인간의 무언가를 이끌어낸다고 해도 마음이 영 동하지 않았다. 나는 통념에 서있었다. 남편은 왜 상처받은 아내를 안아주지 않았던 걸까. 풀어달라고 하기 전까지, 피가 멎을 때까지, 아픔에 딱정이가 들어앉을때까지, 압박붕대처럼 감겨있어야 할 지아비의 온정을 볼 수 없었을때, 내가 쫓던 어미새는 그 온기를 잃어버렸다. 당국의 검열이 심해서, 직접적으로 남녀가 껴안을수 없어서, 의도가 무엇이든 태도의 문제일텐데. 껴안을 수 없다면 왜 은유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 응답하지 않는 사랑과 요령없는 사람에 냉큼 화가 났다. 그리고 그것은 겉돌던 사랑과 요령없던 그 옛날의 아버지에게까지 번졌다. 어릴 때처럼 친하게 지낼수도, 말이 통하지도 않으니 자기도 모르게 잔소리 부터 나오고. 후회하지만 방법은 모르겠고.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아버지 세대의 사랑 역시 통제되고 검열된 어떤 문화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통화 끝에 내게 꼭 사랑한다고 말해주신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그리고 그 뒤로도 꼭 아버지에게 벌을 주려던 것처럼 응답해주지 않았었다. 후에 시간이 더 흘러 겨우 저도요라고 입을 뗐을 뿐. 감정 표현에 서툴고 요령없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처음 영화 중간에 속이 얹히고 말았을때, 나는 이것이 만든이의 태도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를 껴안아 주지 못했던 남편에게서 결국 내 세계를 보고만다. 그곳에는 검열을 피해 도착한 아버지의 사랑과 옹졸한 내 자신, 부박했던 내 삶 그대로가 있었다. 영화는 자기 삶만큼 본다는 그 말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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