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
소설이 참 세속적이다. 욕도 많이 나오고 인물들의 언행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거침 없다. 21세기에 이 책이 출판되었다면 장담하건대 여성계의 엄청난 저항을 받았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책의 모든 인물(여자를 포함해서)들은 가부장적 세계관에 쩔어있고 여체에 대한 자극적인 서술이나 농담이 끊임없이 나온다. 난 즐거웠다. / 소설은 심하다 할 정도로 빠른 전개를 이어간다. 때론 그 전개가 너무 빨라 깔아놓은 떡밥들이 다 흐지부지 될 때도 많다. 작가가 이런 디테일함을 포기하면서까지 빠른 전개를 사용한 것은 결국 허삼관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총괄했을 때 나타나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마치 실록처럼 제목의 마지막에 기(記)를 붙인 것도 이런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 허삼관에게 매혈은 가장의 책임감이다. 가뭄이 들어 가족이 굶을 때, 아들의 성공을 위해, 아들이 아플 때 허삼관은 기꺼이 피를 내놓았다.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아버지의 무게는 읽는이로 하여금 깊은 연민을 느끼게 하지만 이것만으로 허삼관의 인생을 요약하기엔 아쉽다. / 허삼관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 피를 팔려하지만 거절당한다. 자신의 피를 아무도 필요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 허삼관은 허망함을 느낀다. 이때 매혈은 가장의 책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 매혈은 돈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삼관에게 매혈은 곧 건강이고 젊음이다. 어려서부터 건강한 사람만이 피를 팔 수 있다는 자부심 속에 살아온 그에게 매혈의 거부는 곧 사망선고나 다름 없었다. '살아가는 인간'이 '죽어가는 반송장'으로 몰락하는 순간이다. / 사람은 모두 늙는다. 따라서 늙어감에 따른 허망함은 모든 사람이 죽음 이전에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다. 작가는 이 피할 수 없는 고통의 해결책으로 끈끈한 정을 제시한다. 허삼관은 자기의 씨가 아닐 수도 있는 아들을 그 누구보다 아꼈고, 린푸의 사람들은 초면인 허삼관에게 차와 소금을 주었다. 서러워하는 허삼관을 달래준 것은 결국 그가 평생을 피바쳐 키운 아들들과 아내의 친근한 욕지꺼리였다. 정이 넘치지 않는가? / 이 소설은 하정우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개인적으로는 끔찍했다. 한국의 정서에 맞춰 원작의 웃음 포인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dirty joke를 모두 삭제한 것도 큰 원인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소설의 빠른 전개를 담아내지 못하고 그로 인해 각각의 이야기가 연결되지 못해 매혈기(記)로서의 의미를 전혀 살리지 못한 것이다. / 군대에서 읽은 책 (035/100)
13 likes0 repl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