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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는 기나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관람할 수 있다.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2001~2003) 트릴로지와 같은 블록버스터 서사극부터 <벤허>(1959)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처럼 고전의 반열에 오른 서사영화들은 긴 러닝타임이 무색할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경험을 종종 제공한다. 최근에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아이리시맨>(2019)가 그런 경험을 제공했다. 반면 방대한 러닝타임과 끝없는 지루함을 도구로 삼는 작품들도 있다. 필리핀의 라브 디아즈나 왕빙의 다큐멘터리 작업이 그러하다. 정재훈의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 또한 지루함을 무기로 삼는다. 212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지루함을 수치로 나타낸 것이나 다름없다.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는 1부와 2부, 그리고 인터미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어떤 이름 모를 산을 담아낸다. 사운드도 없이 산의 이미지만이 80여분의 시간을 채운다. 물론 1부가 통채로 한 테이크의 이미지인 것은 아니다. 카메라는 줌을 통해 산의 나무를 담기도 하고, 새가 프레임을 가로지르며 날아가기도 하며, 컷을 통해 산의 여러 부분을 잡기도 한다. 하지만 1부에는 별 다른 사건이 없다. 소리 없는 산의 이미지만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산의 풍경으로 어떤 역사적, 지리적, 사회적 맥락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도 아니다. 저 산에는 이름이 없다. 2부에는 사운드가 포함된다. 사냥꾼과 사냥개, 조선소에서의 노동, 정재훈 감독의 반려견이 영화에 등장한다. 세 이야기는 병렬적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통일된 이야기로 향한다거나, 특정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1부와 마찬가지로 2부의 카메라 또한 각 이미지를 담아내기만 한다. 심지어 조선소 장면은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저화질의 카메라는 디지털 픽셀을 가감없이 노출한다. 그리고 인터미션. 20분 가량의 인터미션은 관객들이 통상적으로 떠올릴 법한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인터미션을 알리는 안내문구와 암전된 화면 대신 212분의 러닝타임 동안 가장 다양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등장한다. 일기예보나 주식방송과 같은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사운드와 이미지가 포함되고, 게임 [파이널 판타지]의 음악과 사운드가 포함된다. 그래픽으로 그려진 산의 이미지 사이로 다른 이미지들이 왜곡된 채 나돌아다닌다. 1부와 2부 사이의 격차를 생각하면 이 인터미션은 관문이나 다름없다. 1부와 2부의 피사체들은 어떤 의미를 갖지 않는다. 산, 사냥개, 조선소 노동자, 반려견은 의미가 탈각된 기표들이다. 이들이 갖는 단 하나의 의미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가 도구로 내세운 지루함은 무의미한 기표들에 의해 실현되고, 이것들의 유일한 기능은 지속을 알려주는 것이다. 관객은 지루함 속에서 식별 가능한 이미지를 찾으려는 대신 그 지루함을 감각하게 된다. 식별 가능한 이미지라는 것은 사실 이미 식별되는 것들, 가령 산이나 뭉개진 저화질의 조선소 노동 이미지를 통해 이미 찾아진 것이다. 그것은 의미를 매개하는 대신 지루함으로 감각되는 시간의 흐름을 매개한다. 정재훈 감독은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를 두고 '4DX 어드벤처물'로 여긴다고 했다. 영화에 펼쳐지는 이미지를 감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4DX 효과이고, 어떤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 어드벤처물일 때, <도돌이 언덕의 난기류>는 움직이지 않는 의자로 4DX 효과를 구현하고 가시적인 세계 대신 영화가 지속되는 212분의 시간이라는 세계를 탐험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는 '4DX 어드벤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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