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aucoup

베니스 건축 스케치북
Avg 3.1
나는 작은 가죽 서류 가방을 들고 여행을 다닌다. 노트북이나 아이 패드 대신 여권과 휴대폰, 읽을거리, 그림 도구들이 들어 있다. 그림 도구는 꽤 단순하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그림물감 상자 안에는 쉬민 케 물감과 흑담비 털로 만들어진 시리즈 7붓 3호와 6호, 루모그라프 HB 연필과 로트링 티키펜 0.3mm와 0.5mm짜리가 들어 있다. 물통 역할을 하는 작은 잼 통도 뚜껑과 함께 담겨 있다. 이 가방은 세상 어 디를 가든 나와 함께 다닌다. 물론 베니스에도 가지고 갔다. 1980년 처음 베니스에 왔을 때, 사흘 가까이 종일 비가 내렸는데 정말 놀라 운 날들을 보냈다. 깊은 청회색 하늘과 안개 자욱한 풍경, 감미로운 갈색 빛 밤을 만끽했다. 그런 곳에서 아케이드나 카페를 피난처 삼아 (빗속에서는 수채화를 그릴 수 없으니까) 스케치북을 채워 나갔다. 그로부 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쓰기 전까지 단 이틀도 혼자 보낸 적 이 없는데, 그때는 혼자 두 달이나 행복하게 그림을 그렸다. 베니스는 며칠을 머물든 최고의 휴가지이다. 이곳 건물은 너무 높 거나 거창하지 않고 사람 체격에 잘 맞아서 당신을 두 팔 벌려 맞이 한다. 세계 어떤 도시보다 도시의 여러 모습을 연대순으로 잘 정리해 분석하고 묘사해놓아 비밀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나 흥미롭다. 시적 이거나 학문적인 이야기는 물론 꽤나 진부한 이야기들도 찾아볼 수 있다. 베니스는 아주 많은 별명을 갖고 있다. 우주에 떠 있는 행성 같 은 도시가 아니라서(오! 세상에, 내가 이렇게 과장된 별명을 붙여 부를 수 있 다니) 그 어떤 곳보다 예술가들에게 가장 멋지고 복잡한 배경을 제공 하는 동시에 날것의 예술적 영감을 일깨워주는 도시 같다. 하지만 베니스는 매우 현실적인 곳이기도 하다. 베니스 제국은 지 중해 동쪽과 동양을 잇는 향신료 무역을 지배했었다. 방대한 본토보 다 해양 영역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강점 덕분에 군사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상업에서 강세를 보였다. 리알토 섬의 그리 크지 않은 규 모와 부를 보면 그렇게까지 발전할 것으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 지만 베니스는 막강한 도시가 되기 위해 잦은 해전과 활발한 무역을 벌였고, 재정적인 안정을 갖춘 독창적인 정치체계가 필요했다. 그 결 과 공공기관이나 궁전, 성당 같은 건축물과 거리 곳곳의 회화와 조각 과 다리들을 통해 화려한 권력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