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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마주 보며 걸어갔던 시인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독에 바치는 것이 시라는 걸 알았을 때/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던/ 그때를 생각했다' (천양희, 『새벽에 생각하다』에서) 어느 여름날 버스에 몸을 실은 퇴근길의 이야기도 소설이 되고, 중고거래 앱 개발사 직원이 월급을 신용카드 포인트로 받은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도 소설이 된다. 일상의 작은 균열에서 시작해 세상 밖 미지의 우주로 나서는 이야기도 소설이 된다. 그러나 칠월의 일주일 동안은 김연수의 『일곱 해의 마지막』을, 오직 이것만이 진짜 소설인 것처럼 읽었다. "그토록 강요받던 찬양시를 마침내 쓰는 마음과, 그뒤 삼십여 년에 걸친 기나긴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옛말과 흑백사진과 이적표현의 미로를 헤매고 다녔다. (...) 그러므로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백석은 1996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제 나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된 그를 본다." (244-246쪽, '작가의 말'에서) 소설 하나를 통해 이름과 한두 편의 시 외에는 잘 알지도 못하는 백석이 산 시대를 내내 그리워했고 퇴근길에는서점에서 백석 시집을 손에 들었다. '기행'(백석의 본명)이 스물네 살이던 1935년 6월 통영의 일과, 평양에서 삼수로 떠난 '기행'의 1958년 12월 저무는 해의 풍경과, '병도'가 보낸 뜻밖의 편지를 교차된 서운함과 반가움 속에 펼쳐 읽다 더 이상 읽지 않고 싶어진 '기행'의 마음과, 타오르는 숲을 바라보는 '기행'의 마음을 오래 생각했다. '작가의 말'을 포함한 246쪽이라는 분량은 장편 치고는 그렇게 방대한 양이 아니다. 그러나 꼬박 일주일을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집에서, 밥을 먹다가, 읽고 또 읽었다. 잘 읽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음과 모음들이 빚어낸 작은 세계 하나들과 '기행'이 온 몸으로 살아낸 그 현실의 풍경과 조각 하나하나를 헤아려야만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몇몇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과 지명과 옛말로 쓰인 여러 단어들을 지나자 한 번도 살아보지도 겪어보지도 못했던 세계가 펼쳐졌다. 만난 적 없는 세계를 그리워할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언어가 주는 체험임을 다시 실감했다. 수많은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고 인덱스를 붙이고 마음에 담은 문장 앞뒤에 갈고리 괄호를 펜으로 넣는 동안 이 책이 아마도 내 올해의 소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덮자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남았다. (20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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