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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샷들을 지양한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로 단 한 컷도 선형적이라고 볼 수 없다. 더치 앵글이라던가, 신체 중 어느 한 곳만을 보여준다던가, 포커스 인 아웃을 적나라하게 비친다던가, 조명을 과잉으로 사용하는 등. 다분히 기괴하고 자극적 미장센을 사용한다. 이는 인물들의 단답식 대화와 행동의 빠른 인과와 연관되어 있다. 사실주의 영화와 비슷하게 인물에게서 최대한 감정을 배제시킨 연출과 전술한 특징들은 초현실주의인 것 마냥 드러나게 된다. 때문에 이들이 화면이 비춰질 때 극히 비선형적인 미장센들이 펼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불어 최소화된 대화와 행동은 카메라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줘, 정제된 샷이 대부분이다. . 2. 두 부모는 아이들을 세상 밖의 무언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높은 담장 안의 집에서 가둬두고 양육한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아버지가 개를 알아보러 갔을 때 사육사는 순종적이게 하는 방법을 열거하여 말한다. 이를 아버지는 신중히 듣는다. 이 또한 자식들을 순응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영화상 하얀색이 적나라하게 등장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하얀색은 부정적 의미로 항복을 상징한다. 복싱에서 넉다운이 되면 코치가 하얀 기를 날리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부모가 자식들을 굴복시키고 순응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반영한 미장센임을 짐작할 수 있다. . 3. 전술했듯 영화는 인물의 대화와 행동을 최대한으로 절제하여 기괴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큰 딸이 담장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는 큰 구성점마저 크게 부각시키지 않는다. 단지 빵을 담장 밖으로 던지거나, 비행기를 던지는 등의 행위로 작게나마 표출할 뿐이다. 또한 이 영화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알레고리를 가지는데, 바로 공산주의와 독재정치이다. 이 가족은 그것의 축소판이다. 부모는 자식들을 순종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궁색에 맞추기 위해, 담장 밖으로 넘어가고자 할 거 같은 단어의 의미를 바꾸고, 옷도 비슷하게 입히며, 담장 밖을 넘나들 수 있는 비행기와 고양이를 적대시하게 만든다. 허나 모든 독재가 그렇듯 변화의 씨앗이 스며들기 마련이다. . 4. 아들의 성욕구를 풀어주기 위해 집을 드나드는 크리스티나는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큰 딸에게 거래를 한다. 시간이 갈수록 큰 딸이 담장 너머에 대해 관심을 갖자, 크리스티나에게 비디오를 빌려줄 것을 요구한다. 마치 북한처럼 미디어가 스며든 것이다. 해당 비디오는 록키와 죠스. 큰 딸은 대사와 행동을 따라하며 작은 딸과 아들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큰 딸은 비디오를 보고나서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때문에 모두가 동일시되는 공산주의 체제를 벗어나기 위한 ‘브루스’라는 이름을 자신에게 붙인다. 즉 가족의 엽기적이고 기괴한 모습은 마치 독재정치, 공산주의를 투영하듯, 피폐한 수준으로 그려 넣었다. . 5. 그렇다면 부모가 그토록 자식들에게서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담장 밖을 넘어갈 우려를 주는 단어 ‘소풍’ 등을 제외하고, ‘좀비’, ‘여성의 성기’ 등의 의미를 바꾸고, ‘록키’와 ‘죠스’ 비디오를 본 큰 딸을 폭력으로써 억압하고, 출처인 크리스티나 또한 폭력으로 대하는 것으로 보아, 부모는 음란, 폭력, 잔인함 등. 세상 밖의 악으로부터 자식들을 지키고 싶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6. 하지만 여기서부터 모순은 걷잡을 수 없다. 세상 밖의 악들에서 지킨 자식들의 모습은 누구보다 폭력적이고, 음란하다. 담장을 넘어 온 고양이를 큰 가위로 찔러 죽이고, 체제를 지키기 위해 근친상간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러한 결과는 성악설에 대한 주장이자,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다. 이윽고 큰 딸은 이 모든 것을 느끼고 마주한다. 자유를 향한 갈망을 느낄 때, 얼마나 더 할 수 있는가를 그녀는 보여준다. . 7. 부모의 결혼기념일. 자식들은 공연을 선보인다. 이때 큰 딸은 처음으로 동작을 크게 하며 격하게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휘두른다. 마치 자유를 향한 날갯짓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아령을 이용하여 자신의 송곳니를 부러뜨린다. 송곳니가 없어지면 밖을 나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하얀색이 만연한 화면 속에 큰 딸의 빨간 피는 그녀의 욕구를 심히 보여준다. 큰 딸은 피를 흘린 채 차 트렁크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이때 시종일관 정제되어 있던 샷이 급격한 핸드헬드로 움직이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그녀가 자유를 향해 거칠게 나아가고 있음을 강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차 트렁크 안으로 들어갔을까. 왜냐하면 완연히 세뇌되어 있는 작은 딸과 아들, 그리고 부모가 금방 찾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늦은 밤 트렁크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죽어서라도 바깥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말이다. . 8. 결국 최악의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 되었다. 큰 딸의 자유를 향한 갈망은 원론적인 잔인함만으로도 온전히 보여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안중근 의사의 선택과도 맞물릴 정도로 잔인함을 넘어선 고귀함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큰 주제를 가족이라는 일상적 단체와 집이라는 소박한 공간을 이용하여 표현해냈다는 것은 영화만이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큰 힘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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