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
촌스러운 연출과 80년대적인 인물설정, 투박하기 짝이 없는 대사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콤플렉스를 정확하게 건드리며 하고자 하는 말을 유감없이 토해내는 영화다. 정치적 사안을 두고 그것을 둘러싼 구조적 결함을 지적하는 설득력과 한국사회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과감함은 올해 재난영화중 최고의 달변이었다. <판도라>는 다큐멘터리로는 얘기할 수 없는, 오직 장르 영화만이 드러낼 수 있는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 난데없이 신파가 개입하면서부터 상황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우려의 현실화로 시스템의 결함을 드러내고 있던 재난은 그 메세지를 충실히 전달하다가 갑자기 가족주의 신파극의 수단이 되어버리며, 간신히 드러낸 시스템의 결함은 개인을 영웅화시키고 전체주의적 사고를 재생산하는 이미지 속에서 또다시 은닉된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강요하는 원전의 가장 큰 모순을 비난하던 영화는 갑작스레, 가족의 고통을 착취하고 개인의 희생을 숭배하며 끝없이 수준이 낮아지는 것이다. 이 좃같은 눈물 짜내기가 끝나고 영웅의 희생에 의해 상황이 수습되고 나면 영화가 전달하려고 한 메세지는 온데간데 없고 마지막 장면엔 단순한 슬픔과 안도, 감동과 같은 1차원적인 감정의 자기복제물만이 남아있다.   결국 꽤 훌륭한 스타트를 끊은 영화의 끝은 재난영화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단점들을 모아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참극이지만 나는 이 영화의 용두사미 구조가 영화를 만든 이만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뒤에 있는것은 영화의 작품성보다는 관객을 유치할 수 있는 감동적 장면을 투입하는데 관심을 두는 상업영화의 논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스펙터클 없이 얘기할 관중을 모으지 못하고 스펙터클은 자본 없이 투입될 수가 없다는 것은 한국영화산업의 고질적인 딜레마이다. 그리고 이 딜레마 속에서 벗어나려하지 않고 '즐겁지만 안전한 환상'을 보고 싶다는 하나의 욕구만을 피상적 자극으로 채워주는데 주력하는 기형적인 영화산업, 그 구조에 종속되어 완성되지 못한 원석인 <판도라>는 이 얘기를 꺼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영화이고, 어떤 의미로든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범작이다.
699 likes31 repl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