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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고 넘치는 아이돌마냥 무엇 하나 새로울 것 없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양산형 소설. 뚜렷한 주제 없이 지난 작품 가운데 흥미로웠던 소재들을 골고루 끌어와 짜깁기 했을 뿐인 자기표절 작품이었다. 재미는 있지만, 아무런 고유개성도 없는 작품이었다. 시답잖은 결말은 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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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리즈 작품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뉘어져 있다.
1. 가가 교이치로 형사 시리즈
2. 유카와 마나부 교수 시리즈
3. 닛타 고스케 교수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팬인 만큼 세 시리즈 작품을 대다수 접해보았지만, 솔직히 몇 년 흐르면서 내용 같은 건 잊은지 오래다. 그럼에도 한 가지 특징을 꼽자면, 세 시리즈 사이에는 ‘무게감’ 측면으로 명확한 구분이 있었다. 예컨대 가가 형사 시리즈>닛타 형사 시리즈>유카와 교수 시리즈 순으로 분위기가 무거운 반면 유쾌함은 줄었다.
다작으로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지만 유독 현실사회의 문제점 등을 다루는 ‘사회파 추리소설’에서 인상적인 작품을 많이 남긴 만큼 이에 가장 밀접한 가가 형사 시리즈는 필자가 제일 선호하는 시리즈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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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 작품에서 느낀 실망감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작가 내공이 내공인지라 <기린의 날개>는 영상을 보듯 매끄러운 전개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한 번 보고 금세 잊고 말 그런 작품이었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핵심인 뼈 있는 메시지도 없었고, 추리할 만한 요소도 없었고 살해동기도 진부했다. 더욱이 히가시노 게이고 자신이 집필한 여타 작품에서 이미 써먹은 소재(무관심한 가족, 집요한 매스컴과 그에 따른 피해 등)를 다시 한 번 사용하는 건 작가 실격이지 않나 싶다. 자기표절은 둘째 치고, 이런 저런 소재를 무리하게 쑤셔 넣다보니 당연히 작품성도 밀도 없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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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시리즈물의 매력은 사건으로 인해 주인공이 모종의 변화를 겪거나 성장하는 모습 등을 보여주는 데 있다. 물론 가가 형사 시리즈도 늘 그래왔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가가 형사의 존재는 (이야기 진행을 위한) 탐정나리일 뿐이었다. 끽 해야 ‘아버지 3주기를 준비 중’이라는 개인사를 겪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마지못해 끼워 넣은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개를 위해 이용될 뿐인 무가치한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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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날개>를 읽자니 일본에서도 파견직(계약직)의 처우는 영 신통치 않은 듯 싶다.
경영 효율화라는 명목으로 인간도 기계처럼 다루어지고 버려졌다. 경영진과 파견회사에게 파견직이니 계약직 인력은 유동성을 갖춘 부품에 불과했고, 그들이 품고 있는 꿈 따위 이용해먹기 좋은 수단에 불과했다. 사람이 다치고 사람이 죽어도 책임지는 이는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사건을 은폐하고 또 다른 인간부품을 구해올 뿐인 사람만 있었다. 비극엔 언제나 인간의 이기심이 잔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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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번 작품에서 가가 형사는 탐정 코스프레만 실컷 했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이 정의롭고 인간미 넘치는 인물이었다. 내부 정치나 공을 쌓는 데엔 큰 관심이 없었지만 형사로서의 직업정신은 그 누구보다 투철했다. 특히 사건을 단순 해결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든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려 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사건에 얽혀 있는 가해자는 사죄를, 피해자는 용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픈 사건 종결로 그 누구도 납득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사건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부조리를 그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경찰의 미흡한 조사는 비단 억울한 피해자를 낳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 전체의 삶을 망가트릴 수 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보여준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