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준영

변신 이야기
Avg 3.7
왜 이야기인가. . 인스타그램에서 철학 관련 게시물이 올라올 때 십중팔구 게시자의 프로필 사진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무슨 맥락에서 탄생한 조각인지 이해하려면 단테의 '신곡'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단테의 '신곡'을 제대로 읽고자 한다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읽지 않고 읽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수많은 신명과 인명, 지명에 무지하다면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은 글자 적힌 종이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읽는 이는 최종적으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도착해야 한다. 시작점을 어디로 잡고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궁금하다면, 보르헤스의 단편들이 인용하는 척 하는 작품들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니체의 수수께끼 같은 말들과 프로이트의 알쏭달쏭한 말들을 알아듣고 싶다면 결국은 천지 창조를 설명하는 두 번째로 유명한 이야기(첫 번째야 성경이지만),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그렇기에 오비디우스가 그리스인들의 신화를 받아적을 때, 그는 사실 인류가 향후 수천 년 간 생각하고 살아갈 거대한 방향을 설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만약 오비디우스가 아이스퀼로스처럼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인간과 그 심판의 주인인 신들에 초점을 맞춰 신화를 서술했다면 서구 문명은 칼뱅보다 훨씬 앞서 청교도적 금욕주의 전통을 확립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오비디우스가 에우리피데스처럼 신들의 존재를 회의하고 부정하는 인간들에게 주목하며 고대의 이야기를 전달했다면 오늘날 세계는 니체나 마르크스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오비디우스가 북유럽의 바이킹 친구들처럼 지상의 필연적 파괴와 멸망을 예고하려고 마음먹었더라면 아직까지도 전세계는 유목민과 약탈자들로 구성되어 있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오비디우스는 그러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비디우스는 신들이 운명을 정하나,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들은 사랑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서 남길 수 있다며 인간 찬가를 노래했다. 나는 모든 이야기의 원천인 '변신 이야기'가 이러한 여유와 낙관의 이야기라는 사실에서 안도하고 더 나아가 감동받았다. 인류는 자신의 아득한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기대에 부풀고 희망에 찬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이 막연하게도 코로나19가 극복될 것이라고 믿고 세계가 언젠가는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의 승리를 목격하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그 기쁨의 지분은 언제나 일부분 오비디우스에게 있을 것이다. . 오비디우스는 왜 이런 여유와 낙관을 가지고 신들과 인간들의 세상을 해석했을까? 작가의 유쾌하고 즐거웠던 개인적 삶은 논외로 하고 작품에만 집중하면, 아무래도 첫 번째 떠오르는 이유는 '인간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다'라고 보인다. '변신 이야기'에서 신들 없이 인간들만 등장한다면 그 이야기는 십중팔구 사랑 이야기이다. 자기 자신을 연모하다 죽어버린 나르키소스, 이아손에게 사랑에 빠져 오라비와 아들들을 죽인 메데이아, 오라비를 사랑한 뷔블리스, 여자를 사랑한 여자 이피스,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사랑한 퓌그말리온, 황소를 사랑한 왕비 파시파에 등 터부를 부수는 기이한 사랑 이야기들이 수없이도 많이 등장하지만, 이 역시 작품에 흐르는 경쾌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사랑의 한계는 어디인가'를 탐색하기 위한 삽화처럼 읽힌다. 말하자면, 오비디우스는 과연 인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왜 사랑할 수 있는지 꼼꼼히 살피면서 인간에게 사랑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탐구하고자 한 것 같다. 작가가 '변신 이야기'를 집필한 이유 자체가 애초에 '사랑의 기술'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면서 황제의 노여움을 사 유배당했다는 (전설에 가까운) 내력 때문이라는 점도 그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 . 물론 오비디우스는 극단적인 '찌라시' 사례들에만 집중하지는 않는다. 다만 동서남북으로 사랑의 경계를 더듬어 파악한 후에야 시인은 황야에 드문드문 피어 있는 꽃들과 같은 아름다운 사랑의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대 그리스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도 있다. "죽음이 당신을 내게서 떼어놓았지만, 이 죽음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는 없어요. 무정한 부모님들이시여. 내 부모님, 퓌라모스의 부모님들이시여. 원하오니 저희들 소원을 이루어주소서. 뜨거운 사랑과 죽음의 손길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한 무덤에 묻어주소서." 거기에는 목숨을 걸고 겨루는 스포츠 경쟁자에게 연정을 느끼는 청춘 영화도 있다. "그렇다면 저 청년은 죽을 것이다. 나와 함께 살고 싶어했다는 죄밖에 없는데도 죽을 것이다. 저 청년은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고통스러워할까? 사랑의 대가로 받는 이 부당한 죽음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도 내 승리를 역겨워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평생을 함께한 선량한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저희들은, 대신의 신전을 시키는 신관이 되고자 하나이다. 저희들은 한평생을 사이좋게 살아왔은즉 바라옵건대 죽을 때도 같은 날 같은 시에 죽고자 하나이다. 제가 할미의 장사 치르는 꼴을 보지 않고, 할미가 저를 묻는 일이 없었으면 하나이다...(중략) 잘 가게, 할미. 잘 가요, 영감." 오비디우스는 자신의 천성대로, 이렇듯 다양한 모습으로 제각각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인생을 바치는 인간의 모습에서 진정한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전쟁 영웅들보다, 괴물을 무찌르는 신들보다 서로의 주름진 손을 쓰다듬는 노쇠한 연인들에게 진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자신의 사랑 철학을 설파한다. . 그러나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삶을 지탱해주는 사랑은 언제나 험난한 도전과 맞부딪친다. 솔직히 요약하자면, '변신 이야기'에서 신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인간들의 사랑을 훼방놓는 일밖에 없다. 남자 신들은 툭하면 처녀든 임자 있는 여자든 건드리고는 범해서 개판을 만들고, 여자 신들은 있는 핑계 없는 핑계를 다 대가며 남의 연애사에 어깃장을 놓고 깽판을 친다. 유노 여신(헤라)은 파리스의 심판 때 한낱 트로이아의 왕자가 자신을 가장 예쁘다고 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트로이아를 불태우고 아이네이아스를 지구 끝까지 쫓아가며 괴롭게 한다! 그러나 오비디우스는 인간의 본성이 그러한 장애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러한 도전 정신은 '변신 이야기'에서 신들에게 기꺼이 반기를 들고 인간성의 승리를 주장하는 영웅, 때로는 심지어 악당들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가령 박쿠스(디오니소스) 경배를 못마땅히 여긴 결과 천벌을 받아 어머니의 손에 찢겨 죽은 악당(?) 펜테우스에게 오비디우스는 한 쪽 반 동안 장광설을 늘어놓을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장광설이 제법 멋있다. "뱀의 족속들이여, 마르스의 후예들이여, 어쩌다가 이렇게 미치광이들이 되었느냐? 대체, 놋쇠 바라와 꼬부라진 피리와 속임수와 마술이 어쨌다는 것이냐? 어째서 전장의 창칼 숲도, 진군의 나팔소리도 두렵게 여기지 않고, 칼을 뽑아들고 열을 지어 진군하던 자들이 발광하는 계집, 울리는 방울북, 술 취한 미치광이, 구역질나는 광신자들 앞에서 맥을 쓰지 못한다는 말이냐? 놀랍구나 놀라워..." 철저하게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펜테우스 왕에게 디오니소스는 광기로 찬 경외심이라는 신의 응답을 보여주지만, "그때 제가 뵌 신... 이분보다 위대하신 신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중략) 세상에... 노에는 덩굴이 감기기 시작하면서 손잡이 쪽으로 뻗어 올라오고 있었고, 돛에는 열매송이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펜테우스는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다가 최후를 맞이한다. 과연 오비디우스는 이 자를 불경죄나 저지르는 악당으로 생각한 것일까? .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들이 묘한 숭고미를 풍기도록 하는 오비디우스의 일탈은 계속된다. 무사 여신들을 쫓다가 여신들이 날아가 버리자 "어디를 가든 그대들을 따라가리라"라고 외치며 성벽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고 피로 대지를 물들인 퓌레네오스, "신들과 족보가 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문의 딸도 아니지만" 오직 베 짜는 재간에 의지해 여신 미네르바와 대결한 여자 아라크네(미네르바는 정정당당하게 그녀를 이기지도 못하고 아라크네를 폭행한 뒤 자살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저 자신의 신이 되어 저 자신의 뜻을 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운명의 여신은, 행동하는 인간을 돌보실 뿐, 기도만 하고 있는 인간은 돌보시지 않는다."라며 조국의 적을 사랑하기 위해 조국을 배반하는 스퀼라, 하늘을 침범하고자 태양마차의 고삐를 잡은 파에톤과 아버지 인간의 과학이 만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 이카로스, "천궁의 오만한 여신인 유노를 욕보인 자랑스러운 익시온의 자손"임을 당당히 외치는 켄타우로스들,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오히려 그 역경을 짓밟을 수 있다"며 "우리는 여신의 증오를 비웃어주자. 우리는 여신의 증오를 비웃어줄만큼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아크몬, 이들은 모두 신의 천벌을 받아 비극적인 운명을 맞고 대개 기괴한 변신이라는 형벌에 처해진다. 그러나 오비디우스는 (진정 국가의 질서와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려는 시인과 정반대로) 천벌을 내리는 신의 말이나 그 형벌의 처참함을 길게 묘사하지 않고 도리어 신을 거스르려는 인간의 장대한 웅변을 상세하고 근사하게 기술한다. 어쩌면 작가는 퓌레네오스를 진정한 로맨티스트로, 아라크네를 신과 겨루어 이긴 여자로, 파에톤과 이카로스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선구자로, 켄타우로스를 강인한 전사들의 조상으로, 펜테우스를 알코올의 광기로부터 문명을 구원한 영웅으로 암시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 시인들과 달리 신들을 명시적으로 찬양하는 구절(예를 들면, 오오, 왕뱀 퓌톤을 죽이신 위대한 예언자 록시아스 아폴론이시여, 같은 구절들)이 현저히 적다는 점도, 이미 오비디우스가 신들에게서 초월적 아우라를 벗겨내려고 시도했을 수 있다는 판단에 설득력을 더한다. 어쩌면 작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한낱 진흙의 후예에 불과했던 인간이 무수한 무용담을 거쳐 '신과 같은'(헤라클레스나 페르세우스가 그러했듯)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 오비디우스는 본인 역시 신과 같은 인간으로 남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변신 이야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을 아주 자세하게 소개하며 만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작품의 철학적 메시지를 스스로 공개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드러난 것은 단지 찰나적인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항상 흐릅니다. 강처럼 흐릅니다. 강물에, 어디 가만히 정지해 있는 순간이 있던가요? 물결은 다른 물결에 밀립니다. 그 다른 물결은 또 다른 물결에 밀리면서 앞에 있는 물결을 밀어냅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물결은 밀고 밀리면서 흐르는 것입니다. 앞에 있던 것은 뒤로 처지고, 오지 않았던 것이 옵니다. 그래서 시시각각으로 자리바꿈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집대성한 이야기의 배경들이 쑥대밭이 되었음을 직접 밝힌다. "스파르타는 논밭이 되었고, 뮈케나이는 쑥밭이 되었습니다. 테바이에 오이디푸스의 이름 말고 무엇이 남았습니까? 판디온의 도시 아테나이에 그 이름 말고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트로이아 유민들이 일으킨 로마가 융성하여 세계 지배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이 도시 역시 국력이 신장되면서 변모를 거듭, 언젠가는 이 넓은 세계의 수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뮈케나이와 테바이와 아테나이가 쑥밭이 되었는데 로마 역시 쑥밭이 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변신 이야기' 최후반부에 부록처럼 붙어 있는 로마 신화가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찬양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라는 주장은 따라서 나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다. 물론 오비디우스는 한 명의 로마인으로서 천지창조부터 이어지는 신들의 계보를 영웅들과 인간들의 시대를 거쳐 역사 시대에 직접 연결하고자 하는(베르길리우스와 유사한) 건국 정당화의 욕망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신화적 입지를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그 역시 뒤로 처지는 물결처럼 밀려버릴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읽는 이는 실제로 로마의 영광이 남긴 폐허를, 아우구스투스의 치세가 남긴 쑥밭을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비디우스가 법조인으로, 군인으로, 정치인으로 불멸의 지위를 얻겠다는 목표를 일찌감치 포기한 것은 지혜로운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자명하다. . 그래서 오비디우스는 이야기를 쓴다. 그는 13장 '유민의 시대'에서 호메로스가 그토록 주목하고 부르짖었던 영웅들의 피튀기는 전쟁 이야기 따위 과감하게 생략하고(젊은이들, 전쟁 말고 사랑을 하라고, 사랑을! 이라고 말하는 오비디우스의 육성이 들려온다), 오히려 아킬레우스의 유산인 무구들을 두고 말다툼을 벌이는 아이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기나긴 토론(차라리 디스전)을 현장에 있던 사람처럼 상상해 내어 옮긴다. 오뒷세우스의 웅변은 현대인의 관점에서도 예술의 경지에 오른 하나의 작품이다. "펠라스기 인들이여, 만일에 신들께서 내 기도와 그대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더라면(즉, 아킬레우스가 죽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아킬레우스의 유품을 둘러싸고 벌이는 이런 분쟁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을 것입니다...(중략) (이 대목에서 오뒷세우스는 눈물 닦는 시늉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오비디우스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은밀한 개인적 소망을 드러낸 듯하다. 카오스에서 천지가 창조되던 순간부터 카이사르가 승천하고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로써 로마를 다스리는 역사 시대의 순간까지를 한 치의 빈틈 없이 꿰어냄으로써, 태초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치밀하게 엮어냄으로써 그는 인류의 스승이자 인류의 이야기꾼으로 불멸의 지위에 오르고자 한 것이다. 만일 그가 아무런 편집자적 관점이나 예술적 감각 없이 신화들을 수집해 문서로 옮겨 놓았다면 오비디우스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신화가 그렇고 영국 신화가 그러하며 중국 신화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오비디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탁월한 조율 능력으로 가감하며 하나의 스토리를 가진 이야기로 완성시켰다. 그 이야기에는 당연히 작가의 사상과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고, 그 사상과 가치관은 앞서 살펴 보았듯 운명에 도전하며 사랑을 펼치는 인간에 대한 찬가이자 만물이 허무하게 스러지는 듯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이야기의 능력이었다. 오비디우스는 필요하다면 신화 속 에피소드에 과감히 논평을 달면서까지 자신의 '주제 의식'을 명확히 한다. "지아비가 던진 돌은 남자의 형상을 얻었고, 지어미가 던진 돌은 여자의 형상을 얻었다. 우리가 힘드는 일도 수나롭게 해내는 강인한 족속인 까닭은 이로써 설명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가 우리의 근원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는 오뒷세우스처럼 사실(고대인들에게 신화는 사실이었으니)들을 엮어내는 기술 자체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며 자신의 이름이 '최초의 신화 기록자'가 아닌 '최초의 소설가'로써 역사에 남도록 기획했고, 그 기획에 성공했다. . 그러니 읽는 이가 '변신 이야기'의 결론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스클레피오스가 그리스에서 로마로 건너오는 이야기도 아니고(문명의 횃불이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왔다면, 로마에서 미국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카이사르가 승천하며 아우구스투스가 신과 같은 인간이 되었다는 용비어천가도 아니고(그 역시 오이디푸스가 맹인이 되고 스파르타가 쑥밭이 되듯 언젠가 스러져버릴 영광에 불과하지 않은가!) 도리어 너무 간결한 나머지 소박하게까지 느껴지는 시인의 결사이다. 오비디우스는 적는다. "이제 내 일은 끝났다. 유피테르 대신의 분노도, 불길도, 칼도, 탐욕스러운 세월도 소멸시킬 수 없는 나의 일은 이제 끝났다. 내 육체밖에는 앗아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2020년의 겨울 내가 '변신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비디우스는 또 한 번, 수천 번 그랬겠지만 다시 한 번, 신과 같은 불사의 인간으로 변신하려는 꿈을 이뤘다. 최초의 이야기꾼은 그렇게, 가장 원초적이지만 가장 본질적인 이야기의 기능을 말하며 최초의 소설을 마감한 셈이다. 문학은 필멸의 인간들에게 불멸을 약속한다. 문학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영원에 참여한다. '변신 이야기'가 도서관에서 200번대 신화 코너가 아닌 800번대 문학 코너에 위치하는 이유는 아마 이런 것 때문일 것이다. . +한국에는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오비디우스가 왜 없었을까. 있었다면 그분의 이야기는 소실되었을까. 기가 막힌 솜씨로 무수한 사건들을 단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재주가 한국 신화에 발휘된다면 얼마나 끝내주는 컨텐츠들이 파생되어 나올까 자주 아쉬워하며 읽었다. +고 이윤기 선생님이 번역하신 중역본이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고대 어투의 장점은 없지만 가독성은 정말 좋다. 본래 소설을 쓰셨던 분이셔서 그런지 한 편의 문학작품이라는 느낌이 훨씬 강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