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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카메라ㅡ마크의 카메라ㅡ관객이 한 몸이 된다. 덕분에 관음이 강제되고, 허락된 관음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폭로한 폭력성은 그 찝찝함만을 남길 뿐이다. <피핑 톰>은 탁월한 서스펜스 하에 이토록 흥미로운 알레고리를 함께 아우른다. (※ 스포주의) 영화 역시 관음이라는 표현은 (오늘날의 우리에겐) 익숙하다. 그러나 <피핑 톰>은 그 흔한 비유를 굉장히 단적이고도 반성적으로 활용한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마크의 카메라는, 당연하게도, 두 눈과 남근으로 은유될 수 있어 보인다. 오프닝부터 관객은 그러한 마크의 카메라에 스며들고, 탁월한 장르적 쾌감을 만끽하게 된다. 발기된 카메라와 여성의 리액션 숏이 주는 공포(혹은 쾌감)는 상당하고, 화면은 화려한 색상으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관음의 쾌락. 즉 영화는 빼어난 장르적 재미와 화려한 색감으로 관객에게 시종 관음을 요구하는 셈이다. 그러나 창녀를 상대로 마음껏 휘두르던 카메라는 정작 강자ㅡ중산층 여성ㅡ 앞에선 발기부전이 된다. (다른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이 가능할 테지만, 일단은) 관음이란 이토록 유약하고 치졸한 폭력인 것이다. 또한 관음의 주체로서 폭력을 행하던 마크는 결국 자기 파괴적인 결말을 택하게 된다. 물론 다소 작위적이긴 하나, 그 비약이 되레 섬뜩하며, 처단적으로 강조되는 점이 흥미롭다. 어쩌면 마크는 자신의 죽음으로써 필름을 완성한 것인지 모른다. 다만, 중요한 건 그 마지막 조각과 완성된 필름이 관객에게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정된 위치에서 관객은 오직 마크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결국 관객의 관음은 불완전하고, 그를 이끌던 주체마저 파멸했다. 이제 홀로 남겨진, 마크(혹은 그의 카메라)와 함께하던, 관객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찝찝함만 남는다. 그러니까, 로저 이버트의 말을 빌리자면, "<피핑 톰>은 관객들에게 관음증의 대가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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