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인 해석글, 영화 시간 순서.
강력한 스포일러 다량 함유.
1. 영화는 여자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데, 살펴보면 이 영화의 주연은 '걸프렌드', 제이크, 제이크의 엄마, 제이크의 아빠 4명으로, 여자친구에게 따로 이름을 주지는 않았다.
2. 걸프렌드, 제이크의 여친은 '이제 그만 끝낼까 해' 라는 영화의 제목과 같은 강박에 가까운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생각은 언제나 그녀와 함께하며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마치 이 생각이 '든' 것이 아니라 미리 '박혀있던' 것처럼.
3. 창문에 붙어 중얼거리며 여자를 쳐다보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독백은 영화 내내 등장하며, 카메라를 한 번 환기시킨 후 곧이어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제이크의 뒷모습으로 변한다. 감독은 미리 영화를 풀어가는데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앞으로 등장하는 할아버지=제이크 라는 사실. 여기까지는 이해가 쉽다.
여기서부터는 이미 영화를 전부 다 봤다고 치고 세 가지 전제를 깔고가겠다.
1. 제이크=할아버지.
2. 여자친구는 제이크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
3. 영화는 할아버지의 기억과 환상이 전부.
4. 다시 할아버지. TV 애니메이션을 보고 설거지를 하는 일상중에 밖의 그네가 눈에 띈다. 아까 할아버지는 제이크의 차를 타는 여친을 주택가의 창문에서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 할아버지가 사는 집은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 처럼 보이고, 무엇보다 할아버지 쪽은 날씨가 좋은데 제이크와 걸프렌드 쪽은 눈이 온다. 제이크와 걸프렌드, 그리고 할아버지가 존재하는 공간이 다름을 보여주는 장면.
5. 여자는 친구들에게 전화가 자주온다. 이상한 점은 벨소리도 지나치게 엔틱하고 여자가 발신자를 확인하려 그 큰 글씨를 보는데 꼭 안경을 써야 한다는 것. 눈이 지나치게 안좋아 보인다. 마치 할아버지처럼.
6. 차를 타고가다 방금 지나친 그 그네, 할아버지네 집 앞에 있는 그네랑 똑같이 생겼다. 제이크는 그네가 '부모가 짐정리 하는 동안 애들이 놀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 제이크는 노년에 아이들을 원했을 것이다. 자신이 이삿짐을 정리하는 사이 그네를 타고 놀 아이들을.
7. 여친이 제이크에 대해 대사를 하는 사이, 카메라는 학교 복도를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오른쪽에 여자 두명, 낯익은 얼굴들. 후반에 등장하는 털시 타운 가게 점원이다. 그의 걸음걸이를 따라하며 비웃는다. 제이크는 학교의 관리인(청소부)이었다.
8. 여친과 제이크는 공통점이 아주 많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철학적 관점들과 음악들, 각종 물리적 지식들을 둘 다 속속들이 꿰고있고, 성장 배경도 눈에 띄게 비슷하며, 서로는 따로 있을 때는 둘 다 투명인간 취급을 받을정도의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함께있으면 뭔가 특별해진다. 그녀가 제이크의 상상속 존재이기 때문에.
9. 뮤지컬 지식을 자랑하는 제이크. 특히 뮤지컬 '오클라호마'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자세히 보면 젊은 제이크가 늙은 제이크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 하고있다. 청소를 하다가 학교에서 애들이 연습하는 뮤지컬을 잠깐 봤는데, 그 애들이 지금은 늙어서 동네 슈퍼마켓에서 일한다는 등... 카메라도 늙은 제이크가 청소하며 공연 연습을 훔쳐보는 장면을 보여준다. 제이크와 눈이 마주치자 정색하는 학생. 평소에 그가 학교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보여주는 두번째 씬.
10. 여자는 기억도 흐릿하고, 이전의 기억을 되뇌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계속해서 그녀가 제이크의 상상속 존재임을 암시하는 씬. 심지어 그녀가 낭송하는 시, 추후에 등장하는 제이크의 방에 있던 책의 시다. 상황도 그의 처지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개, 아내 형상의 외로움, 집에 오면 계속해서 나빠지는 처지, 도로와 아이스크림, 구름의 모양. 앞으로 계속해서 등장하는 메타포들. 여자는 시를 낭송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모든 지식과 감정이 제이크의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반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11. 시를 낭송하던 그녀는 눈물을 멈추고 비장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여기서부터는 시의 내용이 완전히 바뀌며 앞으로의 영화 내용을 암시한다. 집에 데려갈 '돌연변이 선물'은 걸프렌드 일 것이고, 뼈의 집은 집이 비었음을 의미한다. 이미 죽었거나, 공허하다거나. 지금부터 보게 될 모든 것들이 공허와 허상임을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대사도 나온다.
12. 다시 여자는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고 생각하고, 마치 자신이 방향을 틀지도 않고 어딘가에 들르지도 않는 기차에 타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차는 제이크의 삶을 의미한다. 다른 방향으로 가지도 멈추지도 않고 계속해서 흘러만 가는 삶. 그리고 이들은 삶과 죽음의 의미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다시보면 제이크의 머릿속에서 두개의 아이디어가 다투고 있는 격. 삶을 끝내는 방법은 죽음 뿐이다. 그는 죽을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
13. 드디어 집에 도착했지만, 양과 돼지들의 처지는 절망적이다. 얼어죽은 양들은 봄이 되어야 태워져 안식을 취하고, 돼지들은 주인에게 버려지다시피 해 구더기에 갉아먹혀 죽었다. 양과 돼지들은 우리에 갇혀 먹고,자고,싸는 삶을 반복한다. 아마 제이크는 자신의 처지가 짐승과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짐승처럼 죽을 수는 없다고. "인간만이 자신의 죽음이 필연적임을 안다." 그말인즉슨,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이에 대비할 수 있고, 덕분에 짐승처럼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14. 제이크의 슬리퍼, 할아버지와 같은 것이고, "내 슬리퍼가 네 슬리퍼지" 라는 대사. 그리고 이후에 제이크의 집에 걸린 걸프렌드의 사진을 보며 제이크가 자신이라고 대답하는 것, 지하실에서 발견한 그녀의 그림에 제이크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 등등. 할아버지=제이크=걸프랜드 라는 이야기를 확인시켜 주는 요소들. 몰아일체가 따로 없다.
15. 드디어 제이크의 부모님을 만난다. 걸프렌드의 첫번째 이름은 루이사. 영화가 진행되며 몇번 더 변한다. 제이크가 그녀에게 특정이름을 정해주진 못해서, 그때 그때 상상속 상황에 맞춰 이름을 지어주는 듯 하다.
16. 걸프렌드의 전화. 확인해본 음성 메세지엔 늙은 제이크의 독백이 들려온다. "풀어야 할 의문은 단 하나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다. 질문은 단 하나." 제이크가 자신의 상상에게 묻는 것은 단 하나일 것이다. 자신의 삶이 존속되어야 하는 이유.
17. 부모의 나이가 계속해서 변하며 공포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것. 집은 제이크의 트라우마 그 자체다. 노년의 나이가 되어 망상을 통해 부모를 회상하는 제이크. 아마 그는 아픈 어머니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요양하느라 자신의 청춘을 모두 날렸을 것이다. 물리학자의 꿈도, 지적인 여자친구도 없는 지금, 그저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청소부의 삶. 절망적이다.
18. 현실과 망상의 타이밍은 절대적으로 영화의 흐름과 일치한다. 무엇이냐 하면, 할아버지의 영화 감상씬 전후로 걸프렌드의 직업이 바뀐다. 화가에서 웨이트리스로, 할아버지가 보고있는 영화 주인공의 직업과 일치한다. 영화를 보는 제이크가 감명을 받아 망상의 내용을 수정한 것. 웃긴 디테일.
19. 지하실을 가지말라고 한 제이크와 그녀를 지하실로 떠미는 엄마. 집이 제이크의 내면임을 감안하면 지하실은 그의 내면 속 깊은 곳이다. 현실의 자신도 컨트롤하기 어려운 깊은 비밀들이 잠겨있는 곳. 이곳에서 걸프렌드는 할아버지 제이크의 청소부 유니폼과 자신의 그림들, 그리고 다시 할아버지 제이크의 질문들을 마주한다.
20. 여자의 독백. 제이크의 내면 속 그녀는 제이크가 자신의 삶을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회상할때 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도와주는 존재이다. 제이크는 '이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로 망상 속 걸프랜드와 함께 과거를 돌이켜 보고 있다. 그녀는 그의 처지에 공감하고 그의 생각과 소통하는 유일한 존재이며, 제이크가 만든 망상속에 빠진 무의식에 가까운 존재임에도 끊임없이 제이크의 내면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아이러니함을 보인다. 망상을 꿈꾸는 제이크의 내면 일부도 결국은 현실을 원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21. 털시 타운. 그곳에서 제이크는 학교에서 자신을 유난히 차갑게 대하던 두명의 여학생을 종업원으로 만난다. 그녀들은 제이크를 보며 익살스럽게 비웃고, 제이크는 그녀들의 눈을 피한다. 그러나 다른 종업원은 예쁜 사람들이 유난히 매정한 면이 있다며 걸프렌드와 공감하려 한다. 그녀는 제이크와 같이 팔에 발진이 났으며, 걸프랜드와 나누는 대사는 어쩐지 제이크와 대화하는 것 처럼 들린다. 누군진 잘 모르겠지만 현실 속 제이크를 친절하게 대했던 몇 안되는 이들 중 한명일 듯.
22. 학교 쓰레기통에 쌓여있는 수많은 아이스크림 통들. 걸프렌드에겐 처음이지만 제이크의 내면에서는 망상이 여러번, 반복해서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영화 처음의 걸프렌드는 남자친구와 만난지 7주 밖에 되지 않았지만 굉장히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것 처럼 느끼고, 처음가는 여행에 왠지 모를 향수를 가진다. 제이크는 그때마다 내용을 조금씩 수정하며 망상을 반복해 온 것. 그런 의미에서 걸프렌드의 '이제 그만 끝낼까 해' 라는 생각은 그녀에겐 제이크의 망상을 끝낸다는 의미이고, 제이크에겐 자신의 삶을 끝낸다는 의미이다.
23. 이 후 학교, 댄스씬에서 제이크는 상상속 그녀와 결혼에 이르는 상상까지 하지만, 끝내 현실속 자신인 청소부에게 가로막혀 실패한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더 심각하게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부분. 반복해서 걸프렌드는 제이크의 주름진 손을 보고 제이크는 현실속 자신의 시선을 눈치채는 등 망상과 현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의 제이크도 환상에 사로잡혀 망상은 절정에 달한다.
24. 뮤지컬 씬은 제이크 망상의 끝이다. 그는 물리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노벨상을 수상했고, 나이가 든 아내와 부모는 그의 시상식에 함께 하며, 와중에 그는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모든게 자신의 상상이었음을 이야기하는 제이크의 노래와 함께 망상은 끝이 난다.
25. 엔딩씬의 눈으로 소복히 덮힌 차.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확실한 점은 환상에 사로잡힌 제이크는 옷을 전부 벗은 채 학교를 거닐다 차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현실과 망상 중 하나를 택했어야 했고, 내내 제이크는 절망적인 현실에 살기를 거부했다. 아마 시간의 흐름을 끊어내고 영원히 망상속에 사는 유일한 방법, '이제 그만 나의 삶을 끝낼까 해'를 계속해서 고민해왔던 제이크가 결국 자살을 택했음을 암시하는 씁쓸한 결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