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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수학자, 폭탄 테러리스트, 아웃사이더. 놀랍게도 이 단어들은 모두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들이다. 바로 시어도어 카진스키(이하 테드)의 이야기다. ‘유나바머’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테드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7년에 걸쳐 미국 전역을 테러했다. 테드는 167이라는 높은 IQ로 16세의 나이에 하버드에 조기 입학했다. 이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사회와 동떨어진 채 숲속에 칩거하면서 범행을 저질렀고, 17년 동안 FBI의 수사를 유린해 수사망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가 덜미를 잡힌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직접 언론사에 제보한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선언문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 그의 선언문은 꽤 논조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술, 담배, 마약같이 몸에 안 좋은 것들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그의 말에는 위험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달콤한 구석이 있다. - 테드는 선언문에서 산업혁명의 결과가 재앙이었다고 언급한다. 산업의 발달로 인해 자연은 파괴되었고 인간은 부품화 되었으며 덕분에 삶은 무의미해졌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의 의견에 100% 동의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 역시 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진보의 지표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한다. 피츠는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빠였던 피츠는 유나바머 사건을 맡게 된 이후 점점 가족에게 소홀해진다. 그는 상사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길 강요당하고, 이용당하고, 또 그 과정에서 본인 역시 점점 타인을 도구처럼 취급하기 시작한다. 결국 가족은 해체되고 피츠는 테드를 검거하는 데 성공하지만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 못 한다. 드라마는 피츠가 변해가는 과정 중간중간에 선언문을 내레이션으로 삽입함으로써 테드의 의견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테드의 선언문과 그의 행동에는 모순점이 있다. 그는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상대로 테러를 감행했다. 그 역시 사람을 도구처럼 여겼던 거다. - 하지만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테드에게도 아픈 과거는 있다. 6화에선 에피소드 하나를 통째로 테드의 일대기만을 보여준다. 그는 어려서부터 너무 똑똑했던 탓에 어린 나이에 상급생들과 같은 수업을 들었고 그래서 외로웠었다. 그의 가치관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계기는 그가 하버드에 재학할 당시, 헨리 머레이 교수가 추진한 심리 실험에 실험자로 발탁되면서였다. 그는 이 실험에 200시간 이상 참여하면서 마음속에 분노와 증오심, 열등감을 키웠다. 이후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해진 그가 동생으로부터 해고당하고, 숲속에서 생활하면서 평범해지기를 갈망하는 그의 모습이 등장한다. 극단적이고 거창해보였던 언행과는 달리 사실 누구보다 사랑을 갈망하고 외로워하는 테드의 모습은 그가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민을 자아낸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었다. - 나의 염려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Manhunt: Unabomber>는 테드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없음을 확실히 못 박는다. 테드와 피츠는 남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또한 좋은 의도를 위해 사람들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경중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같다. 그래서 피츠는 테드를 검거할 수 있었고, 테드는 오직 피츠만을 심문자로 지목한 것이다. 피츠는 테드의 자백을 이끌어 내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 꺼낸다. 아무도 없는 한밤중의 도로에는 피츠의 차만이 대기 중이다. 피츠는 빨간 신호등 앞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산업사회로 인한 주체성과 자율성의 상실을 몸소 실감한다. 피츠의 이야기는 단순히 사탕발린 말이 아니다. 피츠는 그 순간만큼은 테드의 선언문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그러나 비슷해보이는 두 인물에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테드에겐 타인에 대한 공감이 결어되었다. 피츠는 테드의 테러로 손가락이 없어진 남자를 보고 그의 아픔에 통감한다. 하지만 테드에겐 본인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벅차서 타인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비슷해보였던 두 사람이었지만 사소한 차이 하나 때문에 결과가 전혀 달라진 것이다. - 두 사람의 상반된 결과를 본다면 공감의 결여는 결코 가볍게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드라마를 보는 동안 몇 번이고 섬뜩함을 느꼈다. 테드가 그의 사상을 전파시키는 방법과 태도는 놀랍도록 IS와 일치한다. 유나바머와 IS 같은 집단은 사회로부터 배제당하고 착취당한 자들의 심리를, 그들의 욕망과 결핍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한다. 문제는 이들이 사회의 주류보다도 더 잘 이해한다는 점이다. 몇 년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국인 최초의 IS 김군을 기억하는가? 김군은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IS는 그럴듯한 말로 소외계층을 구스리지만 누구보다 악독한 방식으로 그들을 착취한다. 어디 소외계층 뿐이겠는가. 유나바머 수사가 진척이 없었던 이유는 초반수사 때 유나바머를 고졸에 일용직을 전전하는 워킹클래스로 단정 지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평균보다 월등히 뛰어난 인재였다. IS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실제로 적지 않은 유럽의 지식인들이 여전히 IS로 향하고 있다. - 이들이 정말 위험한 이유는 증오를 계속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테드가 심리 실험으로 세상을 증오하게 되었듯이, 테드의 피해자들은 테드가 평생 자신들처럼 고통 받길 원한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장 다치게 될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이다.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는 평범한 가장이었던 김수현(이병헌)이 아내를 죽인 장경철(최민식)에게 복수를 하는 내용이다. 그는 장경철이 피해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장경철을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다가 마침내 장경철의 모친이 보는 앞에서 그를 살해한다. 그는 복수에 성공했지만 분노와 상실감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모친의 절규 소리가 귓가에 닿게 되면서 그 이상의 자괴감을 느낀다. 테드 역시 나중에서야 이 사실을 깨닫는다. 타인을 증오할 시간에 사랑을 했으면 달라졌을 거라고. 그러나 후회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고, 그가 자유라는 명목으로 했던 행동은 결국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족쇄가 되었다. - 피츠는 테드를 설득한다. 당신은 감옥에 갇힐 테지만 당신의 사상은 살아남을 거라고. 마침내 테드는 유죄를 인정하고 피츠는 법정에서 승리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몇 년 동안 골머리를 썩였던 사건이 해결되었는데 생각만큼 기쁘지가 않다. 테드의 수감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로에는 피츠의 차뿐이다. 피츠는 신호를 대기하면서 빨간 신호등을 바라본다. 그는 여전히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의 말대로 테드의 사상은 살아남았다. 역사상 최악의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이자 누구보다 명석했던 천재의 사상이. 피츠는 감옥에 있는 테드보다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테드의 이야기가, 김군의 이야기가 과연 그들만의 사정인지 한 번쯤 재고가 필요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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