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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숙 감독은 이주 노동자 문제를 주제로 삼은 <이주>와 <계속된다> 이후로 꾸준히 노동과 여성의 문제를 다큐멘터리로서 다뤄왔습니다. <빨간 벽돌>은 그간 감독이 만들어온 작품의 연장선상에 놓인 영화입니다. <빨간 벽돌>은 크게 두 가지의 축을 지니고 있어요. 하나는 한국 노동운동에 한 획을 그은 ‘구로 동맹파업’에 참여했던 여성 노동자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2010년대 현재 20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에요. 이 두 축에 속한 이들은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 둘의 생각과 행동을 비교하는 식으로 과거와 현재의 노동을 바라보기를 시도합니다. 그 접근 방식은 단순히 인터뷰를 맞붙이는 식이 아니에요. 구로 동맹파업에 참여를 했던 이들에게는 처음부터 파업의 경험을 듣는 대신, 지금 현재의 상황을 먼저 듣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로써는 결코 쉽지 않은 ‘파업’이라는 선택을 고른 이유를 묻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저 ‘노동 운동에 대한 당위성’으로 바로 연결되지는 않아요. 지금보다 훨씬 더 ‘여성 노동자’를 ‘공순이’를 남들도 비하하고 자기 역시 자학하던 시절, 대학교를 가도 여전히 자유롭지 않던 시절 누군가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학하지 않고 권리를 위해 행동하는 동료 노동자의 모습에 감정적으로 조응하면서 ‘노동 운동’은 자연스럽게 가야 할 하나의 길이 됩니다. 그러나 작품은 그 선택지가 만든 ‘기회비용’의 여파도 놓치지 않습니다. 이어서 영화는 청년들에게도 이야기를 듣지만, 방식은 앞서와 같지 않아요. 초중반부의 인터뷰에서 영화는 청년들에게 각자가 자신이 하는 노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이어서는 구로 동맹파업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번갈아 읽게 하고,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해고’를 가지고 논하는 ‘사고 실험’에 이들을 처하게 합니다. 일반적인 스타일의 다큐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상당히 낯설고 당황스럽게 만들기 좋은 구성이죠. 사실 구로 동맹파업에 참여했던 이들의 이야기 파트와 청년에 대한 파트가 서로 자연스럽게 맞닿지는 않습니다. 심지어는 단박에 보일 정도로 이 두 파트는 서로 대비되게 연출하고 있어요. 구로 동맹파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밝고 트인 장소에서 진행된다면, 청년들의 이야기는 통제된 환경의 스튜디오에서 어두운 톤으로 진행됩니다. 이렇게 온도차가 큰 두 파트의 대비는 구로 동맹파업이 벌어지던 1980년대와 2010년대가 선형으로 이뤄질 수 없음을 보여요. 이미 50대에 접어든 이들이 20대를 기억하는 것과 현재 20대인 이들이 20대를 기억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노동와 사회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환경도 이전과 다르고요. 하지만 양측의 각자가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서 어떤 선택지를 골랐고, 왜 골랐으며, 그 선택지가 만든 결과를 묻는 것은 동일합니다. 단지 각자가 살고 있는 시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을 따름이죠. 이 양자를 잇는 방식이 거칠기는 하지만, 의도적으로 차이를 두는 <빨간 벽돌>의 접근법은 서로를 단순히 ‘역사’나 ‘이해’라는 말만으로는 ‘운동’을 잇게 하기 어려운 현실을 드러내고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청년들에게 ‘구로 동맹파업’의 문서를 읽게 한다고, 단순히 기념표지를 만든다고 해서 과거의 ‘운동’이 곧 현재의 생각을 만들지는 못하니까요. 마치 감독의 전작이었건 <족장, 달라진 곳>에서 과거의 조선소 노동자와 필리핀 수빅 한진중공업의 조선소 노동자를 비교하고, <가난뱅이의 역습>이서 ‘게스트하우스 빈집’을 통해 현재 청년들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연대를 하며 움직일 수 있는지를 비췄던 것처럼, 낯선 연출법이 역설적으로 현재 놓인 대다수의 현실이 처한 복잡성과 어려움을 <빨간 벽돌> 역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화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홍효은의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이나 임흥순의 <위로공단>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현재의 (여성, 청년) 노동’을 반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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