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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해한 세상, 진화하는 연상호 1.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지옥>을 봤습니다. 19일 공개 예정인데, 담당 기자들에겐 어제 오늘 딱 이틀 간 먼저 볼 수 있게 해줬죠. 볼 수 있는 시간을 업무 시간(9 to 6)으로 한정해놔서 몰아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6부작으로 짧은 편이어서 가까스로 다 볼 수 있었습니다. 2. <지옥>은 꽤나 어둡고 무거운 작품이었습니다. 연상호를 흥행 감독 자리에 올려준 <부산행>이나 <반도>보다는 그가 실사영화를 연출하기 전에 만든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와 더 유사한 분위기였죠. 넷플릭스 구독자 반응이 어떨지 예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일부분 경쾌하며 유머러스하기도 했던 <D.P>나 <오징어 게임>과 달리 시종일관 가라앉아 있어서 앞선 두 작품만큼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3. 전 <지옥>이 참 맘에 들었습니다. 연상호가 진화했다는 걸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돼지의 왕>과 <사이비>에서 확인한 연상호의 능력은 강렬한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주였습니다. <부산행>과 <반도>에서 보여준 건 좀비로 대표되는 이른바 '크리쳐'를 이질감 없이 작품 속에 녹여내는 연출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은 작가로서 연상호, 연출가로서 연상호의 장점이 절묘하게 조합된 작품이라는 거죠. 국내 감독 중 이런 능력을 가진 게 누구냐고 한다면, 연상호 말고는 봉준호밖에 생각이 나지 않네요. 4.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크리쳐가 매우 인상적인 작품입니다만 더 중요한 건 역시 이 작품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면에서 전 이 작품이 '빈티지 연상호'를 좋아하는 관객의 기대감을 충분히 채워줄 거라고 봅니다. 각본은 정교합니다. 반전은 충격적입니다. 영화보다는 드라마가 작가로서 연상호의 능력을 더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장르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리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OTT는 연상호가 가장 잘 뛰어놀 수 있는 플랫폼으로 보입니다. 5. <지옥>의 설정은 이렇습니다.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 누군가에게 죽음을 예고합니다. 넌 언제 죽는다, 라고 정확한 시간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 시간이 되면 지옥의 사신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나 당사자를 죽입니다. 새진리회라는 종교 단체는 이것이 죄 지은 자를 벌하는 신의 계시라고 주장합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 죽음이 정말 단죄의 행위인지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새진리회를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6. <지옥>은 불가해한 세상을 한탄하는 작품입니다. 다양한 작품이 떠오르더군요. <밀양> <곡성> <다크 나이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다우트> 등이 그런 영화이겠지요. 성경의 <욥기>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한 이 세계를 견뎌내기 위해 기어코 의미를 부여하는 자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감독은 연상호 그리고 나홍진 정도인 것 같습니다. 7. 출연하는 모든 배우의 연기가 뛰어납니다. 양익준 박정민 김도윤의 연기가 특히 좋습니다. 김현주는 연기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는 느낌도 들더군요. 그리고 역시 유아인. 참 독보적인 연기였습니다. 저에겐 유아인 최고 연기였다고 봅니다. 할 얘기가 더 있습니다만 그건 앞으로 나올 기사에서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ㅎㅎㅎ (아래는 제가 쓴 기사입니다) 연상호에게 지옥은 판타지가 아니다. 그에게 지옥은 현실이다. 세계는 언제 지옥이 되는가. 앞날을 알 수 없을 때,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다. 인간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할 때다. 그것은 갑자기 닥친 불행일 수 있고, 재난·재해일 수 있으며, 경제의 몰락일 수도 있다. 불확실하고 불가해한 일이 반복될 때 세계를 지탱하는 땅은 흔들린다. 해석되지 않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우리 삶을 뒤흔들고 있다는 불안이 곧 지옥이다. 그런데 이런 불안이 없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나. 그래서 현실은 곧 지옥이다. 이제 연상호는 묻는다. 이 무의미의 지옥 속에서 어떻게 살 거냐고.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은 연상호 필모그래피의 변곡점이다. 독립 애니메이션 영화 '돼지의 왕'(2011)과 '사이비'(2013)가 연상호 1기였다면, 상업 실사 영화 '부산행'(2016)과 '반도'(2020)는 2기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지옥'은 연상호 3기를 공표한다. '지옥'은 그가 플랫폼을 옮겨와 연출 방식에 변화를 줬다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연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보여준 이야기꾼으로서 재능, 실사 영화를 선보일 때 꽃피운 장르물 연출력(2기)을 조합해 OTT 드라마 시리즈에 이식했다. 다시 말해 '지옥'에서 그는 깊이와 재미를 동시에 손에 쥐고 6시간을 내달린다. '지옥'은 연상호의 최고작이다. '지옥'엔 죽음 고지(告知)와 죽음 시연(試演)이 있다. 미지의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누군가에게 죽음을 예고하고, 예고한 날짜와 시간에 또 한 번 정체불명의 존재가 등장해 그 죽음을 행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 나타난 게 종교 집단 새진리회를 이끄는 정진수(유아인)다. 이 미스테리한 사람은 이 현상을 이렇게 해석하고, 주장한다. '죄 지은 자를 벌하는 신의 계시다. 죄 짓지 말고 더 정의로워져라.'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현상을 본 뒤 세상은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이 일은 어떤 과학, 어떤 이론으로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단죄일까. 이 불안을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이들은 이제 정진수의 말을 신봉하기 시작한다. '지옥'은 구약성서의 '욥기'를, 이창동의 '밀양'을, 나홍진의 '곡성'을, 코언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크리스토퍼 놀런의 '다크나이트'를, 존 패트릭 샌리의 '다우트'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 작품 속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리고는 고통 속에 몸부림친다. 의심하고 화내고 절규하고 체념한다. 이들 작품 속 악당은 다른 게 아니라 불쑥 찾아와 우리를 흔들어 놓는 혼돈과 우연이다. 이 카오스에도 역시 의미는 없다. '지옥'의 고지와 시연 역시 어느날 갑자기 예고 없이, 어떤 기준도 없이 찾아온다. 이제 '지옥' 속 인간들은 이 무의미를 견뎌내기 위해 어떻게든 의미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연상호는 이 깊고 어두운 이야기를 장르물로 치환한다. 작가로서 연상호, 연출가로서 연상호의 장점이 조합되는 지점이다. 그 출발은 '불가해함'이라는 추상적인 말을 죽음 고지 및 시연, 지옥의 사신으로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고지는 최대한 갑작스럽게, 시연은 사신을 상징하는 크리쳐를 활용해 최대한 난폭하게 그린다. 그리고나서 새진리회(새로운 믿음)와 경찰·변호사(기존의 믿음), 자경단(혐오와 절멸), 피고지자(혼돈을 마주한 사람)를 구분해 대립시킨다. 고지와 시연의 급작성과 폭력성, 얽히고설킨 인물 구도가 맞물리며 긴장감이 유지된다. 주요 캐릭터를 과감히 퇴장시키며 1~3부와 4~6부를 구분한 결정도 인상적이다. 심각하기만 한 이야기, 유머 하나 없이 무겁기만 한 분위기, 과감하고 강도 높은 표현 수위, 다소 긴 분량 등을 볼 때 '지옥'은 OTT 플랫폼 외엔 담아낼 수 없는 작품이다. 만약 영상 콘텐츠 시장이 과거처럼 TV드라마와 영화 두 가지로 양분돼 있었다면 '지옥'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영상 콘텐츠 시장이 TV·OTT·극장·유튜브 등으로 세분화된 건 어쩌면 연상호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하는 데 최적의 기회가 됐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보여줄 게 많은 연상호를 가장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곳은 역시 넷플릭스 등 OTT로 보인다. 이제 연상호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만들고 드라마도 연출한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지옥'을 완성한다. 흥미로운 건 김현주·양익준·김도윤 등이 기존에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연기한다는 점이다. 김현주는 더 과감하고 단단하게 움직인다. 양익준은 감정을 삭힌다. 김도윤은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박정민과 원진아는 캐릭터가 약한 평범한 인물을 맡았음에도 존재감을 보여준다. 김신록 역시 쉽게 잊히지 않는 연기를 한다.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유아인이다. 그는 신비로우면서도 뒤틀린 내면을 가진 정진수라는 인물을 과장된 제스처 하나 없이 완성한다. 연상호·최규석의 캐릭터 조형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큰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정진수의 카리스마를 만들어낸 건 결국 유아인의 재능이다. 연상호는 단 한 번도 세상을 긍정한 적 없다. 그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이고, 어떤 면에서 보면 염세적이기까지 하다. '지옥'의 화법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무의미한 일들로 가득한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법도, 신앙도 아니다. 혐오와 배제와 절멸은 더욱 아니다.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의 해결책을 인간적인 것 바깥에서 찾을 순 없다. '지옥'은 결국 사랑과 연대를 말한다. 구태의연해 보여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연상호는 사랑과 연대가 현실이라는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준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최소한 이 지옥을 견뎌낼 수 있다고 말한다. #지옥 #연상호 #유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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