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
홍상수 영화 특)) 개봉작 보고 나면 차기작 영화제 출품되어 있음 (※ 스포주의) 이 영화를 좋아하는 (홍상수) 팬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이따금씩 감상적이고 서정적인 정조가 비치긴 했지만, 이번엔 전보다 훨씬 짙어진데다 시한부라는 설정으로 아예 눈물을 쏟아내고 파토스를 자극한다. 앞선 장면들 안에 담긴 왠지 모를 처연함과 쓸쓸함을 설득해버리는 고백. 서툰 기타 연주를 아름답고 서글프게 만드는 장면. "얼굴 앞에는 내일도 과거도 없다"는 그녀의 말처럼 영화는 오직 현재뿐이지만, "그 모든 게 은총"이라는 말과는 달리 너무 쓸쓸하기 짝이 없다. 현재의 축복에 산다기보다는 현재만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는 아니었을까. 얼마 남지 않은 내일은 기약할 수 없고, ㅡ내일 당장 여행을 떠나자던 재원의 수작만 하더라도 단번에 깨지고 만다ㅡ 과거조차 도망치듯 떠났거나, 죽어버리려던 기억이 담겨 있다. 반가움과 그리움 따위가 뒤섞인 채로 향한 듯한 옛집이지만서도, 과거의 기억을 건져 올리려다 그만 후회만 더 새겨 버리고 만다. 점차 외로워지던 최근 영화들 가운데 <당신얼굴 앞에서>는 그야말로 그 정점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소품에 가까울 지경으로 찍는 듯한 인상을 주던 근작들에 비해 <당신얼굴 앞에서>는 제법 힘을 주고 찍은 모양새처럼 느껴진다(물론 어느 쪽이 더 낫다는 건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인상이 그렇다). 오프닝 속 틸팅과 줌아웃이나 엔딩의 페이드아웃부터 그렇지만, 유독 눈에 띄는 장면이 몇 있다. 이를테면 다리 밑에 기묘하게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상옥의 형상. 돌이켜보면 그녀는 그런 자세로 그렇게 다리 밑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싶은 연민도 든다. 또 하나는, 갑작스레 찾아 간 옛집의 어느 방에서의 장면. (홍상수가 사랑하는 단어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 "예쁘다"는 실체 없는 형용사만을 어김없이 굳게 믿고 거머쥔 채, 얼굴 모를 소녀를 꼭 안는다. <인트로덕션>에서 이미 포옹, 안는다는 행위의 유별난 감흥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과거의 잔해만 느껴지는 공간에 들어앉은 폐소적인 숏 구성 와중에 상옥과 달리, 현재보다 미래가 더 감지될 수밖에 없는 아이를 향한 포옹은 아무래도 서글프게 되새겨진다. 혹시 상옥이 가지지 못한 과거와 미래를 모두 간직한 대상은 아니었을까. 특히 이때 문 유리에 상옥의 모습이 어슴푸레 비치는데, 그 자체로 기묘한 환상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나, 마치 유리나 거울로 은유되던 무한한 확장의 감각이나 반성적인 감각이 결코 온전치 못한 것 같다는 느낌도 남는다. 물론 통상적인 해석을 허용치 않는 홍상수 영화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아이를 애처롭게 안아주던 상옥의 처지와 닮았다. <인트로덕션> 때와 마찬가지로, 오랜만처럼 느껴지는 홍상수의 술자리도 인상적이긴 하다. 솔직한 취기 속에 웃음, 죽음, 슬픔, 섹스의 그림자가 넘실댄다. 영화를 송두리채 흔들어버리는 듯한 상옥의 고백마저 자리하는 만큼 가장 깊고도 중요한 씬이 아닌가도 싶지만, 달리 덧붙이고픈 말은 없다. 대신 그보다 더 눈길이 가는 건 다음에 이어지는, 상옥과 재원이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장면. 그 숏이 만드는 감정이 어떤 건지는 스스로도 정리가 잘 안 되긴 하나, 개인적으로 <인트로덕션> 코멘트에 남기기도 했던, 홍상수 영화 속 담긴 뒷모습 모음에 추가하고 싶은 순간이다. 물론 앞서, 잠시 들렀던 옛집을 나와서 걸어가던 상옥의 뒷모습도 마찬가지긴 하겠다. 꾸밈이 없지만 아름답고, 예찬적이지만 쓸쓸한 <당신얼굴 앞에서>는 분명 인상적인 영화다. 앞서도 말했지만 홍상수의 영화에 매너리즘을 느끼던 오랜 팬들이 새삼 흥미롭게 보지 않을까 싶은 인상이다. 한편으론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이유영이 그러했던 것처럼, 홍상수 영화에 처음 등장한 이혜영이 전혀 새롭고 놀라운 감각을 이끈다. 물론 홍상수의 또 새로운 영화, 라거나 또 다른 페이즈로 접어들어 보인다, 라는 건 그의 영화가 나올 때마다 주변에서 곧잘 쏟아지는 표현이지만,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서 그만치 교묘하게 위치해 보이는 <당신얼굴 앞에서>는 유난히 (최근의 행보에 비해서) 새롭게 느껴지는 영화다. 다만 이상하게도, 당장은 어딘가 거리를 두게 된다. 그렇다고 흥미롭지 않다거나 별로였던 건 아닌 탓에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김민희의 부재 때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홍상수는 김민희와 너무 많은 영화를 찍었고, 두 사람의 결과물을 퍽 재밌게 본 나로서는 거기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었나 싶다. 실제로 <지맞그틀>로 입문했을 뿐만 아니라, '김민희 연작'은 모조리 극장에서 봤다. 그만큼 내가 느끼기에, 홍상수의 세계에서 김민희가 차지하는 지분은 적지 않은 셈이다. 분량이 유독 줄긴 했어도 짤막하게나마 여전한 존재감을 보였던 <인트로덕션> 때와 달리 이번엔 아예 배우로 참여하질 않는다. 물론 <당신얼굴 앞에서>는 이혜영 배우가 (성공적으로) 장악한 영화긴 하나, 그럼에도 김민희의 잔상은 남았다. 예컨대 첫 장면 중 조윤희가 꿈 얘기를 할 때.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좋은 꿈을 꿨어" "이상한 꿈이었어" "근데 좋았어" 같은 식의 (홍상수스러운) 대사였는데, 너무도 김민희가 했음직한 대사처럼 느껴졌다. 아무 설명이 되지 않는 설명, 어색한 어조, '좋다' '이상하다' 따위의 단어 선택. 다른 장면부터는 그래도 조윤희가 하더라도 어울렸지만, 그 장면에서 그 대사들만큼은 그동안 김민희가 해온, 김민희에게 맞는 대사 같았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그 대사를 정말 김민희가 했다고 믿지 않을까 싶다. 말하자면 <당신얼굴 앞에서>는 김민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새로운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김민희는 페르소나를 넘어 거의 미장셴이자 구조, 서사처럼 작동했으니까. 그래서인지 <당신얼굴 앞에서>는 김민희의 부재로도 (혹은 부재라서)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홍상수의 증명이자 과시처럼도 다가온다. 혹시 유독 힘을 준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일까. 사람에 따라선 앞으로도 김민희가 없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감상도 있을 것 같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간 홍상수 영화에 새겨진 김민희의 존재감이 새삼스럽다.
189 likes6 repl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