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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극복할 수 없는 이야기꾼들의 이야기. (스포일러 있음) (5월 17일에 작성, 5월 21일에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 영화의 첫 숏. 프레임의 우측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언뜻 담배와 누군가의 손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그제야 관객은 그 연기가 담배 연기임을 알 수 있다. 그 담배를 쥔 손의 주인공 종수가 프레임의 중앙에 들어오기까지는 수 초가 더 흘러야 한다. 종수가 카메라의 전면 중앙부로 들어와 짐을 부리면, 그제야 카메라가 종수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프레임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던 택배 차량의 뒷문은 더 이상 숏 상에서 어떠한 기능도 하지 않는다. 그 택배 차량의 문에서 내뱉은 택배 짐조차도 단지 종수를 해미에게로 이끄는 역할까지만을 수행할 뿐이다. 아웃포커싱된 채로 프레임 우편에 들어온 해미를 스쳐가는 순간, 포커스는 해미에게로 맞춰지고 이번엔 종수가 아웃포커싱된 상태로 프레임 우편에 방치된 채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를 계속 흘끔거리던 해미가 그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순간에야 그 숏은 비로소 멈출 수 있다. . 이창동은 이 영화에서 유달리 프레임 위에 어떤 정보를 시각화하기를 머뭇거린다. 그 숏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정보는 늘 뒤늦게 프레임의 중앙에 놓이거나 혹은 후에 등장할 별개의 숏으로 유보된다. 마치 무언가의 부재를 관객에게 먼저 인지시킴으로써 그 존재 혹은 부재의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키를 카메라가 쥐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한 태도.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영화의 첫 숏은 사실 이 영화의 서사가 움직이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영화는 마치 종수와 해미의 관계가 이야기의 핵심에 놓여 있는 양 시침을 뚝 떼고 진행되지만, 실상 해미의 존재는 첫 숏의 프레임 중앙을 처음 차지했던 택배 차량의 철문, 혹은 그 철문 밖으로 나온 택배 짐과 같다. 그 철문과 택배 짐이 결국엔 첫 숏에서 종수를 해미에게로 이끄는 역할만을 하고서 프레임 밖으로, 영화 밖으로 영영 밀려났던 것처럼(실제로 종수는 그 첫 숏 이후로 다시는 택배 일을 하지 않으며, 다시 택배 물류창고로 면접을 보러 간 자리에서도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바로 자리를 뜬다.), 해미 역시 종수와 관객을 영화의 핵심이랄 수 있는 요소에게로 이끈 뒤 영화 밖으로 영영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이 영화의 서사는 해미가 부재한 뒤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영화의 중후반부 대부분을 차지하는 종수가 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카메라는 지속적으로 종수의 트럭 앞 유리를 통해 벤의 차량을 바라보는데, 이를 통해 카메라는 벤의 차량의 뒤를 쫓는 운동이 진행 중이라는 인상을 주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은 첫 숏에서 카메라가 택배 짐을 들고 걷는 종수의 뒤를 따라가는 운동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결국 이 영화의 첫 숏은 이 영화 자체의 축소판인 셈이다. . 그렇다면 해미가 종수와 관객을 이끌고 도달한 영화의 핵심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귤 판토마임과 벤의 존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 해미는 종수와의 술자리에서 두 번에 걸쳐 귤 판토마임을 선보인다. 존재하지 않는 귤을 먹는데도 입에 침이 고이고 정말 맛있다며, 그러기 위해선 ‘귤이 존재하지 않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핵심이라 말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 부재 자체를 망각하게 함으로써 존재케 하는 것. 이것은 사실 ‘이야기’ 혹은 ‘영화’ 그 자체의 본질이다. 영화 내의 모든 작업들은 눈앞에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관객으로 하여금 망각하게 하기 위한 작업들이며, 유능한 이야기꾼일수록 관객이 부재를 망각케 하는 데 도가 튼 이들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 영화는 귤 판토마임이 곧 영화 자체가 구동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음을 강조하려는 듯한 연출을 줄곧 선보이곤 한다. 종수가 ‘보이지 않는’ 고양이 보일이에게 밥을 주는 씬은 파주 집 축사에서 ‘실제 그 자리에 존재하여 눈에 보이는’ 암소에게 여물을 주는 씬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는 다시 영화 후반부 벤의 아파트에서 ‘보일이’라고 부를 때 반응하는 고양이를 만나는 씬과도 연결된다. 또한 종수의 집에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오고 받을 때마다 답을 하지 않는 씬들은 영화 후반부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씬과 그 뒤 엄마와 재회하는 씬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씬의 연쇄에서 관객들은 마치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았던’ 것들이 비로소 ‘보이고 들리게 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고양이 보일이가 알고 보니 존재하는 고양이였고, 이전부터 전화를 걸어 대답하지 않던 사람은 사실 엄마였다고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후암동 해미의 집에서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행동과 파주 종수의 집에서 소에게 여물을 주는 행동은 아무런 연관성도 없으며, 벤의 집에서 본 고양이는 단지 ‘보일아’라고 부른 소리에 반응했을 뿐 그 고양이가 해미가 키우던 보일이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마찬가지로 그 여러 번의 전화가 모두 같은 이에게서 걸려 왔으리란 보장도 없으며, 그 전화의 주인공이 종수의 엄마였으리란 보장도 없다. 해미의 파주 집에 우물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 사람들의 말이 모두 갈리는 것처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 영화가 전혀 관련 없는 씬들을 연출의 묘로 그럴 듯하게 연결시키는 순간 관객은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어떤 연관성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믿게 되는 것이다. . 이처럼 해미가 종수 앞에서 귤 판토마임을 선보이거나, 고양이 보일이의 이야기나 우물 이야기를 던지거나, ‘진실을 말해보라’며 대놓고 종수에게 게임을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해미는 이야기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이를 통해 관객을 가지고 놀 줄 아는 꽤 능숙한 이야기꾼처럼 보인다. 그런 그녀가 종수 앞에 벤을 데려온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벤이 요리를 제물에 비유하는 모습이나, 해미가 종수에게 게임을 걸어왔듯 종수에게 부러 비닐하우스 태우는 이야기를 하며 게임을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벤 역시 해미 못잖은 이야기꾼임을 알 수 있다. 벤은 종수에게 비닐하우스 방화 이야기를 할 때 이를 자연에 비유하더니 '자연은 동시존재'라면서, '나는 파주에도 있고 반포에도 있다' 등의 이야기를 한다. 이는 해미의 귤 판토마임과 더불어 이야기의 본질이자 이 영화의 서사가 움직이는 방식을 건드리는 언급이라고도 볼 수 있다. 벤은 해미가 흥미롭다는 이유로 그녀와 가까이 지내며, 종수에게도 곧잘 재미있다는 언급을 하곤 한다. 마치 해미나 종수가 이야기의 소재인 것처럼. 한 편, 벤은 종수에게 자신을 소재로 이야기를 쓰라고 말하기도 하고, 종수 역시 벤을 이야기의 소재인 것처럼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에 비유하는가 하면, 벤의 비닐하우스 방화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그때까지 꾸었던 엄마의 옷을 태우는 꿈 대신 비닐하우스가 타는 꿈을 꾸고 직접 방화를 시도하기까지 한다. 즉, 이들 세 명은 각자가 이야기꾼인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의 객체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이 세 명의 관계는 <Barn Burning>을 쓴 윌리엄 포크너, <헛간을 태우다>를 쓴 무라카미 하루키와 이창동 간의 관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 종수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글을 쓰고자 하지만 좀체 글을 쓰지 못하는 인물이다. 영화 내에서 그가 쓴 첫 이야기는 아버지의 재판을 위한 탄원서인데(공교롭게도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를 쓰기 전 종수는 변호사로부터 '네 아버지 이야기를 소설로 써 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첫 독자는 외국인이라 그의 글을 이해할 수도 없으며, 두 번째 독자는 ‘정다운 이웃’이란 부분을 문제삼아 그의 글이 거짓임이 너무 뻔히 보인다는 듯 이죽거리며, 세 번째 독자이자 가장 중요한 독자인 판사에게는 그의 글이 전혀 먹히지 않아 결국 아버지는 징역형을 받게 된다. 즉, 탄원서를 쓸 때의 그는 실패한 이야기꾼이다. 그런 그에게 해미는 귤 판토마임으로 이야기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일러주고, 또 다른 이야기꾼이자 어쩌면 종수의 이야기의 소재가 되어줄지도 모를 벤에게로 종수를 이끈 뒤, 스스로 사라져 버림으로써 종수의 이야기가 (그리고 동시에 이창동의 이 영화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끔 기름을 부은 셈이다. 이의 방증처럼, 종수가 해미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낸 다음, 어린 종수가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바라보는 환상(꿈) 씬이 등장하고, 그 뒤 종수는 해미와 벤이 떠난 자리에서 라이터를 발견한다. 종수가 본격적으로 벤으로 대표되는 계급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는 시점이자 자신의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열을 올리는 시점이 바로 해미가 사라지는 그 지점임을, 영화는 '불타는 비닐하우스'와 '라이터'의 존재로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마침 '불타는 비닐하우스 씬'은 종수가 후반부에 그러하듯 벤의 비닐하우스 방화 이야기를 살인의 메타포로 받아들이게 될 경우 '해미의 피살' 그 자체에 대한 암시로 읽히기도 한다.). .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마치 포크너와 하루키의 작품을 소재 삼은 이창동의 이 영화가 그러하듯이) 해미와 벤을 소재 삼아 시작된 종수의 이야기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씬은 종수의 자장 하에 있다. 해미의 경우 종수가 부재한 독자적인 씬을 단 하나도 부여받지 못한다. 종수의 입장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은 결코 프레임 안에 시각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벤의 경우, 종수가 온전히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프레임 안에 구현된 씬이 두 개 존재한다. 하나는 헬스장 씬이며, 다른 하나는 벤이 자신의 집에서 여자의 입술에 화장을 해 주는 씬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이 영화가 종수의 이야기를 따라 전개된다는 점을 더욱 강조하는 요소라고도 볼 수 있다. . 종수의 이야기는 해미가 사라진 뒤 그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 벤을 미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위의 두 씬 중 헬스장 씬은 종수의 미행 과정 중에 등장한다. 종수는 해미의 방을 마스터키로 따고 들어간 뒤 벤의 미행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그 중 두 번째 미행 시퀀스는 특이하게도 경찰차 내부의 시점 숏으로 시작된다. 이 시점 숏 역시 이 영화가 종수 1인칭 관점의 이야기라면 시각화되어서는 안 될 숏이다. 그렇게 시작된 그 시퀀스는 역시나 시각화되어서는 안 될, 위에서 언급한 헬스장 씬으로 마무리된다. 종수가 벤을 미행하여 헬스장이 있는 건물 앞까지 도달하면, 그에 대한 역숏처럼 벤이 종수를 내려다보는 숏이 이어진다. 지금까지 1인칭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이야기가 해미의 실종 이후 처음으로 해미의 방에 들어간 그 때부터 갑자기 어떤 힌트라도 얻은 것처럼 처음으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시퀀스가 등장한 것이다. . 벤이 여자의 입술에 화장을 해 주는 씬은 더욱 노골적이다. 그 씬은 아예 종수가 해미의 실종 이후 해미의 방을 두 번째로 방문한 씬과 바로 맞붙어 있다. 해미의 방에서 해미가 종수를 애무하는 숏. 그리고 종수가 그 방에서 바지를 반쯤 내리고 홀로 누워 있는 숏. 이는 종수가 해미 실종 이후 두 번째로 해미의 방에 찾아간 때이다. 그리고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쓰는 숏. 그 다음 숏에서 카메라는 창밖에서 글쓰는 종수를 지켜보며 점점 줌아웃한다. 마치 하늘에서 종수를 내려다보는 듯한 이 숏은, 이전에 손으로 나비 혹은 새의 형상을 만들어 자유로이 하늘을 날고픈 열망을 표현한 바 있는 해미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벤이 자신의 집에서 여자의 입술에 화장을 해 주는 씬이 등장한다. 마치 바로 이전 숏에서 해미의 방에서 종수가 쓰고 있는 글의 내용이 이 씬으로 시각화된 것처럼 말이다. . 해미의 실종으로 종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종수가 처음으로 해미의 방에 들어갔을 때 이는 처음으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숏(경찰차 내부 시점 숏, 벤이 종수를 내려다보는 숏)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때의 그 숏들은 아직 종수의 시야가 닿는 위치에서 진행되는 숏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해미의 방에 들어갔을 때, 종수는 자신의 환상을 온전히 현재 위에 시각화할 수도, 자신이 온전히 부재한(자신의 시야가 아예 차단되어 있는) 완벽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숏을 시각화할 수도 있게 되었다. 자신에게 이야기의 본질을 일러주고 이야기의 소재를 제공한 뒤 사라진 해미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종수의 이야기는 마치 선배 작가의 조언을 받고 퇴고를 거치듯 더욱 디테일한 형태로 다듬어지는 것이다. .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이야기꾼 중 해미와 종수는 이야기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벤과 극명하게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다. 벤의 집에서 벤은 파스타를 요리하며 요리를 제물에 비유하더니 그것이 ‘메타포’라고 말한다. 해미는 메타포가 뭐냐고 묻는다. 그러자 벤은 메타포가 무언지는 종수에게 물어보라 말한다. 그러나 종수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 화장실이 어디냐 묻는다. 벤에게 있어 이야기란 곧 ‘메타포’를 담게 마련이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이야기도 어쩌면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미와 종수에게는 그렇지 않다. . 해미는 카드빚이 쌓였고 가족과도 연락을 끊었고 친구도 없다. 그녀가 부시맨의 그레이트 헝거를 말하고 케냐의 노을을 이야기하다 ‘사라지고 싶은’ 열망을 말할 때 이는 단지 메타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비참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출구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녀는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녀는 귤 판토마임을 할 때도 '귤을 정말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귤을 먹고 싶어야 귤의 환상을 꿀 수 있다. 이때 귤은 메타포가 아니다. 그녀에게 이야기는 차라리 당위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메타포가 무언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벤은 그렇게 자신의 모든 이야기마다 자신의 비참한 삶을 탈출하고픈 열망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해미를 이해할 수 없다. 해미의 귤 판토마임과 벤의 동시존재 언급은 결과적으론 이야기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선 유사하나, 해미는 그때조차도 '귤을 실제로 먹고 싶어해야' 하지만, 벤은 단지 자연을 메타포로서 언급할 뿐이다. 이런 차이 때문에, 처음엔 해미에게 흥미를 보였던 그였지만 곧 질려 버리곤, 그레이트 헝거 춤을 추는 그녀를 볼 때에도 터져나오는 하품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 파주에서의 롱테이크 숏에서 노을빛 아래서 옷을 벗고 손으로 나비 혹은 새를 만들며 춤을 출 때도 해미는 그것이 단지 메타포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열망을 실현시켜 줄 것처럼, 해미가 이내 프레임 밖으로 사라져 버린 뒤에도 카메라는 다음 숏으로 넘어가지 않고 해미의 춤선을 따라 하늘을 활공한다. 그리고 그 날 이후 해미는 사라진다. 자신이 했던 이야기처럼 ‘노을빛’을 배경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현실 안에서 그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던 그녀는 차라리 이야기에 잠식되어 버리는 길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 종수에게도 이야기는 단지 메타포에 그치지 않는 당위의 문제이다(벤은 종수에게 '종수 씨는 너무 진지하다. 진지하면 재미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종수의 이야기가 해미가 사라진 순간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해미가 등장한 마지막 씬이 끝났을 때 등장한 것은 바로 '불타는 비닐하우스 꿈' 씬이었다. 종수는 그 씬이 등장하기 전에 '아버지가 시켜서 어머니의 옷을 태우던 이야기'를 하며 '그 꿈을 아직도 꾼다'고 말하는데, 그 꿈이 '벤의 이야기를 듣고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는 꿈'으로 대체되어 시각화된 것이다. 이 씬을 통해 종수에게 있어 현실의 굴레를 일깨우는 아버지의 존재는 벤에 대한 열등감으로 치환되고, 어머니의 부재는 해미의 부재(불타는 비닐하우스는 벤의 이야기 속에서 해미의 죽음의 메타포가 되므로)로 치환된다. 종수의 탄원서는 종수의 아버지를 징역형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하고, 어머니의 카드빚을 대신 갚겠다는 종수의 제안은 '네가 돈이 어딨어?'라는 어머니의 한 마디 앞에 무력해지고 만다. 이제 종수가 향할 곳은 '불타는 비닐하우스 꿈'을 매개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현실의 서사를 대체한, 벤과 해미를 소재로 한 자신의 이야기뿐이다. . 자신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비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데 반해 벤은 무얼 하는지도 모르나 돈은 많은 젊은 남자, 흡사 ‘개츠비’와 같은 모습이다. 자신에게 피붙이라곤 결혼한 누나를 제외하면 집 나간 어머니와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아버지 뿐이건만, '개츠비' 벤은 어머니와의 친분을 전화로 과시하며 '우수한 유전자' 운운하지 않던가. 또한 종수는 그저 외롭고 솔직하며 종수를 너무나도 믿었을 뿐인 해미를 사랑하면서도 그 맘을 고백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방에서 자위나 하더니 기어코 그녀에게 ‘창녀’라고 실언을 하여 큰 상처를 입혔다. 종수는 벤에 대한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해미에 대한 자신의 실패한 사랑을 포장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 벤의 집에 있던 손목시계는 해미의 손목시계여야만 한다(애초에 그 손목시계는 경품으로도 뿌리던 손목시계이며, 여수 축제에서 종수가 만났던 해미의 직장 동료도 손목에 그 시계를 차고 있었으므로, 사실 반드시 해미의 손목시계라는 보장은 없다.). 벤의 집에 있던 고양이는 해미가 키우던 보일이여야만 한다. 벤의 비닐하우스 방화 이야기는 여성 살해의 메타포여야만 한다. 해미는 벤이 죽인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해미가 사랑했던 남자이자 해미를 사랑한 남자인 종수 자신이 해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비웃고 해미의 이야기에 하품을 했으며 기어코 해미를 죽이기까지 한 벤을 죽여야만 한다. 그의 이야기에 메타포란 존재하지 않는다. 벤의 이야기 속 메타포(방화)마저도 종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실현되고야 만다. . 벤과 달리 현실에 조금도 기댈 구석이 없는 종수와 해미는 끝내 자신의 이야기를 극복하고 현실로 나아갈 수 없는 비참한 이야기꾼들이다. 아버지를 혐오한다던 종수이지만, 벤을 단죄할 때 그는 아마도 아버지가 숨겨두었던 칼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야기를 매듭지으려던 순간조차도 현실은 늘 그의 뒷덜미를 잡는다. 해미는 옷을 벗고 노을빛을 받으며 춤을 추고 이야기에 잠식되어 사라졌다. 벤을 죽인 뒤 종수 역시 제 옷을 모조리 벗어 해미가 그랬듯 나신이 된다. 해미의 나신을 비추었던 노을 대신 벤의 차가 불탄다. 마지막 숏에서 종수의 얼굴은 희뿌연 차창에 가려 좀체 보이지 않는다. 그 실루엣마저도 암전 뒤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극장에 불이 켜지면 이야기 속으로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비참한 현실을 견뎌낼 재간이 없던 우리의 이야기꾼은 결국 제 이야기마저도 견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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