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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친숙한 동시에 가장 낯선, 내면과 일상이라는 공포. 살인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언제나 "동기"다. 살인이라는 비일상적이고 비정상적인 행위는 왜 일어날까. 대체 왜 사람은 사람을 죽이는 걸까. <큐어>는 몇 차례의 살인 사건을 보여준다. 살인을 저지른 이들은 교사, 의사, 경찰 등 모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군이다. 직업적 특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타인을 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이 상당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데, 피해자 역시 그들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아내와 동료이기도 하다. 더욱이 살해 동기는 불분명할 뿐이다. 횡설수설하는 인물들처럼 갑작스럽게 펼쳐지는 살인은 혼란만을 가져오고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결과처럼 남는다. 경찰들은 "싸웠냐", "미워했냐" 등 살인이 일어날 법한 이유를 찾으며 그들의 동기를 특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살인이 일어날 만한 상황은 없었다. 다만, 생각해보면, 애당초 살인이라는 것 자체가 전혀 '상식적'인 게 아니지 않을까. 그런데 살인에서 상식적인 이유를 찾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인 살인을 저지르는 데 있어 합리적인 이유란 무엇인가. 물론 영화에서 넌지시 지적되듯 모두 일상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온 듯 보인다. 체면, 불편, 무시 등 삶을 짓누르는 감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쌓여만 갔을 테고, 딱히 해소할 길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직업적 특성과 사회적 시선 때문에 더욱더 억누르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는 타카베도 마찬가지인데, 영화 후반부 마미야와 대면하며 본인 스스로 감정을 직접 터뜨리기도 하지만, 정신병을 앓는 아내로 인해 무의식적인 스트레스가 쌓여가고 있음은 이미 영화가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에 제법 흥미로운 건, 그러한 일상의 스트레스가 그다지 거창하게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반부 교사에게선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마미야 탓에 슬쩍씩 짜증이 비칠 뿐이고, 의사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대담하다"는, 은연중에 내뱉은 환자의 성희롱이었다. 동료를 죽인 경찰 역시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이유를 고백하나, 정확히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지적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카베 집안에 울려 퍼지는 텅 빈 세탁기 소리. 얼마간 진동을 동반한 소음이 타카베의 심리를 교묘히 건드리고, 또 대변하는 것만 같다. 반복적이고 습관적이며,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점차 누적되고야 마는 것들. 결국 살인을 촉발하는 건, 어떤 특정한 동기가 아니라 차라리 불특정적으로 누적되는 감정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감정, 내면을 외면하는 사람들처럼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스트레스는 묻어야 하는 것이며, 끝내 쌓여만 가는 감정은 언제 터질지 모를 화약고처럼 자리한다. 영화는 살인을 무심하고 건조하게, 아무렇지 않은 것마냥 묘사함으로써, 평범한 순간에서도 돌연 폭력이 터져 나오고 무언가 벌어질 것만 같은 긴장감, 말하자면 일상의 불안을 유지한다. 특히 영화는 (비단 세탁기 소음뿐 아니라)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차가 지나는 소리, 빗소리, 물이 떨어지거나 흐르는 소리, 전등 따위가 점멸하면서 나는 소리 등 온갖 일상의 소음을 담아낸다. 화면 안에 쌓이는 소음들로부터 불길함과 불쾌함이 묻어나는데, 그 자체로 일상이 간직한 불온함 같기도 하다. 마미야는 결국 위태로운 일상을 기어이 터뜨리는 존재인 셈이다. 최면을 통해 내면 속 분노를 촉발시키는 것처럼 그려지는데, 요컨대 마미야는 저마다 품은 화약고에 불을 붙여주고 있다. 이에, 아마도 마미야는 단순히 뛰어난 최면술사라던지, 정신병적인 살인교사범과 같은 특정한 (장르적인 캐릭터) 누군가라기보단 개인에게 내재한 일탈에의 욕망, 폭력, 살의를 끄집어내는 무의식의 대유물처럼도 느껴진다. 한편 마미야는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당신은 누구냐"고, "여긴 어디냐"고, "당신의 얘기를 하라"고.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불안한 내면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 속을 뒤집어보게 만드는 마미야의 질문은 위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형사로서의 타카베나 남편으로서의 타카베가 아닌, (어쩌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그 자신 자체를 보게 만드는 일. 그렇다 보니 영화에서 최면이라는 건, 내면을 파고들어 파묻혀 있던 감정과 마주하도록 만드는 길처럼 보인다. 그 길이야말로, 아슬아슬하게 삶을 버티는 이들에게 가장 큰 공포이자, 외려 자신만의 삶을 잃어버린 이들을 위한 역설적인 치유가 되어 버린다. 예컨대 타카베에게 아내의 자살이라는 환영은 가장 절망적인 슬픔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내심 바라고 있던 결말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가장 친숙한 장소라 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스트레스를 받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그래서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잠재한 순간이다. 살인 역시 (누적된) 스트레스와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 속에서 발생했고 또 발생한다. 이러한 일상의 이율배반적 특성은 어쩐지 우리 내면과 닮았다. 영화 초반, 세탁소에서 욕설을 살벌히 중얼거리다가도 세탁소 주인에겐 상냥하던 아저씨처럼, 우리는 애써 괜찮은 척 웃어보이고 불안과 스트레스를 감추지만, 사실 가면을 쓸 뿐인지도 모른다. 마미야처럼 누군가 살며시 등을 떠밀어 주기만 한다면, 누구나 폭발할 가능성은 잠재한다. 가장 친숙한 동시에 가장 은밀하고 낯선 것으로서의 내면과 일상은 마치 가면을 쓴 양 삶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가장 큰 공포다. 이처럼 내면과 일상이라는 요소를 더듬으며 그려가는 건조하지만 스산한 <큐어>적 풍경은 그야말로 실존적인 공포와 절망이며, 엔딩의 계승 내지 전염은 기요시적인 묵시록의 출발처럼 느껴진다. 호흡을 앗는 고요한 침묵과 틈입해대는 사소한 소음들이 뒤섞이고, 롱테이크와 1초도 안 되는 짧은 숏들이 부딪히는 것처럼 비단 타카베의 환시나 마미야의 최면을 넘어 아예 영화가 관객을 향해 최면을 내던지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의 착란적인 리듬이 불길하고도 숨막히는데, (이후 이어진 기요시 감독의 숱한 걸작에도 불구하고) <큐어>는 가장 가장 기요시다운, 매혹적인 살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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