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슭

공산당선언
Avg 3.9
현 시대에도 마르크스, 공산주의자를 빨간 괴물로 치부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무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정작 그 허위의식을 말한 자는 마르크스인데도), 그리고 마르크스 선언의 위대함을 동시에 느낀다. - 역사의 중심에서, 그것을 스스로 창조해가는 주체로서 스스로를 여겼던 인간들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계급투쟁을 채워넣은 마르크스는, 그래서 문명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궈낸 혁명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공산당 선언>을 썼을 때의 나이가 겨우 29세에 불과한 것을 기억해낸다면 더욱 그러하다. -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피끓는 외침은 그러나, 현대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겐 공허하고 위험한 망상이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했다. 자본에는 복종을, 억압에는 기만을. 만국의 노동자들은 투쟁과 혁명보다 텔레비전 앞의 안락에 종속되기를 바란다. 이것을 비난할 생각은 결코 아니다. -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마르크스의 금언처럼, 우리를 대중문화 속에 함몰시키려는, 그 달콤하고 가벼운 유흥에 취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지 말이다. 마르크스의 저작을 금서로 규정하고, 공산주의라는 말 자체를 위험한 것으로 인지시키고, 아직도 빨강 컴플렉스를 조장하는 그 심연은 무엇인가. - 마르크스는 실패자처럼 취급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유물사관에 본인도 모르는 정답을 숨겨놓았다. 변증법이 지배하는 역사는 분명 그가 말한 공산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데려다주지 않았지만, 자본주의는 충실하게 변증법적 발전을 거듭해 끊임없이 변모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그가 말한 계급투쟁의,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사관은 형태만 조금 바뀐 채 지속되고 있다. 여전히 우리가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 모른다고 해서 낡고 퇴보한 것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아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두 눈으로 들어다봐야 한다. 마르크스가 99%의 노동자들을 위해 천명했던 혁명과 선언의 의미를,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가난과 고초의 길을 선택하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과 함께 걸어가길 원했던 그의 결단을, 힘든 노동의 부조리함을 폭로하기 위해 자본이라는 심연을 끝없이 파헤쳤던 그의 집요함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