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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chop_moo

chopchop_moo

8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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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Books ・ 2017

Avg 3.6

그렇게 큰 내용은 없지만 도중도중 등장하는 비유들이 참 예뻤다. ---- 예전부터 철길을 애틋한 마음으로 좋아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사람들 역시 결코 나눠지지도 않고 합쳐지지도 않는 한 쌍의 궤적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이다. 한쪽은 가시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생의 바깥길이고, 다른 쪽은 보이지 않는 생의 안쪽의 길이라 해도. ---- 그것은 먼 여행지의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들어가 처음 커튼을 걷고 내다본 모스크나 타워, 혹은 이제 막 도개교가 열리는 도심의 강변처럼 예상치 못했던 얼굴이었다. ----- 희도는 나를 봄장미라고 놀렸다. 봄장미란 철을 모르고 다른 계절에 핀 꽃이었다. 희도로선 도무지 알 수 없는 계절을 사는 여자였지만, 현재로선 자신이 유지하는 형식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유일한 내용물이었다. 나는 희도를 밍크고래라고 불렀다. 그의 바다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였지만, 보편타당이라는 부드러운 피하지방에 둘러싸인 희도는 항상적이고 안전하고 포근했다. 그리고 나는 등불을 들고 홀로 세상을 지나가는 여자였다. ------- 나는 거실 창문을 열었다. 비가 들이치며 이내 발등을 적셨다. 오월의 비에는 쇠붙이 비린내가 났다. 슬픔도 아니고 아픔도 아닌 그저 삶이 남기고 가는 부식의 냄새. ------ 나는 예전과 다름없이 계란을 손에 쥐듯, 반쯤만 희도를 잡았다. ------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는데? 비 오는 날 참외처럼 외로운 목소리야.” ------ 유리창에 달라붙는 빗방울들을 보면 언제나 나 자신 같았다. 한사코 달라붙어도 미끄러져내리고 만다. 그러니 달라붙지 않는다. ------ 슬픔이 일어날 때면 나는 새하얀 티슈를 뽑듯 재빨리 뽑아내 아무데나 버렸다. 슬픔이라는 멜랑콜리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사실은, 정말로 겪어본 사람만 아는 비밀이다 ----- 나는 우리가 이별이라는 짐승을 옆방에 가두어두고 잠깐 말장난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