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혼란스러우면서도 정적인 이 세상에서 돋아나는 가시들을 껴안은 사랑을 본 나는 이제 어떤 신념으로 살아가야 하나. 사랑을 하나의 실패라고 여겼던 나에게 구원이란, 모든 절망과 분노와 슬픔을 뒤로 한 채 다가오는 길고도 강렬한 키스와도 같은걸까. 기도하려는 마음 자체가 기도가 되는 것처럼 질문을 품는 것이야말로 답을 찾는 개혁의 시작점(First Reformed).”
정적인 혼돈과 무음의 비명, 고요한 고통과 처절한 사랑. 뒤섞인 감정들 속에서 강렬하게 끝나버린 영화에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혼란스러운 질문들. 답을 내리기에만 열중되어 있던 내가 그럼에도 안도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답을 찾는 가장 중요한 방법을 비로소 알게 되어서 인가보다.
그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때에, 지구의 모습이 나오자 나는 누가 병을 앓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내가 자세를 고쳐 집중하기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병든 화자와, 병든 지구, 그리고 병든 교회. 우리가 만일 이 3개의 세계에 속해있다면, 나는 어느 쪽에 서서 이 병으로부터 구원받아야할까.
자만이 절망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신의 위대함에 의심을 품고서 다른 사람의 확신을 믿어서라면, 양 극단에 서서 서로의 말은 듣지 않은 채 본인의 뜻만을 외치는 그들의 소통이 내 눈에는 그저 절망과 분노로만 가득 차 있어 보인다. 중간이 없는 이 시대가 병들어 버린 이유 중 하나가 자만과 절망임에는 분명하다. 톨러가 병을 앓고 있는 이유까지는 아니겠지만 그의 오만한 확신이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난 후임은 틀림없듯이.
내가 지금 품고 있는 분노나 고통, 자기 연민과 자기 파괴들도 어쩌면 실은 여태껏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껍데기뿐이었던 신념마저도 뒤흔들리고 있어서겠지. 과거에 있었던 나의 부끄러운 점들과 오늘, 나의 세상을 둘러싼 아니꼬운 것들, 그리고 내일을 향한 공포가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을 때, 내가 그토록 피로한 이유가 질문밖에 존재하지 않은데 자꾸만 답을 찾으려고 해서일까. 마치 그 질문에는 두 개의 극단적인 보기가 있고 이 세상은 그 두 개가 공존한다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을 것처럼 말이다.
“신이 우리를 용서해주실까요.”라는 질문에 톨러가 말하길, 우리는 답을 찾는 대신에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은 미지와 신비가 있어야지만 공존할 수 있고, 개인에게 있어서 타인과의 다름은 개인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며, 절망이 있기에 그만큼 희망이 빛나는 것이겠지. 우리는 어둠 속에서 불을 사용할 줄 안다. 위기가 닥쳐오면, 양 극단에 서 있던 우리는 중간에서 만날 수도 있다. 우리는 그걸 “합리적”이라고 부른다. 끝까지 밀어붙인 자가 세상을 움직였지만, 세상을 구한 자는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던 자다.
답이라는 게 옳은 하나의 답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어쨌든 나를 비롯한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시발점은 질문에서부터 시작되므로, 무엇이 옳고 어떻게 옳은 이상향만을 쫓으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득 나와 세상을 향한 질문을 품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살아갈 목적은 충분한 듯하다. 다만, 모든 질문에는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차있다면, 그 행위 자체가 자만하다고 볼 수 있겠다. 영화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행위를 마치 병에 대해 내린 진단의 원인을 찾는 것과 유사하다고 간주한 것처럼, 우리에겐 원죄로부터 회귀함이 필요로 할 것이다. 그곳에는 부끄러운 과거와 분노로 가득 찬 오늘과 두려운 내일을 마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보다는 사랑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나는 지구의 태초로부터 거슬러 파괴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비행한 것을 성찰이라고 본다면, 몸과 몸을 가장 밀착하여 서로를 의식할 때를 사랑이라고 간주하겠다. 이제는 현실을 더 깨달으라고 하지만, 과연 본인은 이 병든 현실을 잘 알고 있는지. 답을 내리지 않음에 자만함과 거리를 두고, 질문을 내림에 세상을 신비롭게 하는 것. 그것이 마냥 비현실적일지라도, 조금의 두려움과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더 이 세상을 향한 현실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잃은지도 모르는 상실의 시대, 어떤 병을 앓는지도 모르는 고통의 시대 속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눈 감아버리는 지금 우리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자비 없는 자문이 필요하다. 그것이 마냥, 세상에 대한 물음만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는 지금 고민을 앓고 있는 사람을 비롯해 집이 무너질까 하는 걱정으로 집 밖을 뛰어나와 교회로 달려간 사람들까지 모든 이들에게 유효하다. 비록 맘에 안 들어 찢어버리고 태워버리더라도 말이다. 끊임없이 되묻고, 돌아보고, 분노하고, 용서하며 비로소 사랑하는 것. 그것이 시작이다.
공감하는 만큼 부정하고 싶은 이 이야기에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우면서도 정적인 이 세상에서 돋아나는 가시들을 껴안은 사랑을 본 나는 이제 어떤 신념으로 살아가야 하나. 영화에서 말한 이 말, 기도하려는 마음 자체가 기도가 되는 것. 나는 마치 영화가 질문을 품는 것이야말로 자기 개혁의 시작점(First Reformed)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사실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의 분노 섞인 말들은 마지막 문단에 와서야 조금은 부드러워지련다.
끊임없이 신과 소통을 원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마주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부끄러운 어제와 분노로 가득 찬 오늘과 두려운 내일 사이에서 이 영화를 보고서는, 여전히 무수히 남아있는 생각들을 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원은 어쩌면, 모든 절망과 분노와 슬픔을 뒤로 한 채, 사랑이라는 건 하나의 실패라고 여겼던 나에게 다가오는 길고도 강렬한 하나의 키스같다고 말하는 걸지도. 최고의 엔딩이었다.
2/3. 갑자기 드는 의문점이 생겨 적어보는 점들. 스포일러)
일차원적인 생각에서,
그가 철사를 몸에 두르고는, 자살을 하려할 때 메리가 들어왔다.(아니, 이미 와 있었다.) 물론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진짜로 들어온 게 맞을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잠겼던 문을 들어오는 것도, 게다가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들어올 수는 없으니까.
“구원은 모든 절망과 분노와 슬픔을 뒤로 한 채, 사랑이라는 건 하나의 실패라고 여겼던 나에게 다가오는 길고도 강렬한 키스와도 같은걸까.”
만일, 단 한번도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그가 생의 끝에서 들은 신의 응답이 메리였다면? 나의 가정은 이렇다.
메리가 그에게로 찾아온 밤, 둘은 서로를 밀착시키고 숨소리만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나는 그녀가 실제로 오지 않았을 경우를 생각해본다. 그 날의 메리는 톨러의 마음 속에 품었던 질문의 답이었던, 신의 응답이었든 간에 그 날은 메리가 오지 않았던 날이라고 했을때, 그저 영화적 마법이었던 그 장면의 명분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마치 종말의 역사를 비행한 그는 그 이후로 그의 마음(의지)은 굳건해진 듯 했다. 때문에, 자신의 의문 속에서 본인 스스로가 대답한 상황이었던, 신이 응답을 해준 장면이던 자연스러운 설명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 피가 철철 흐르던 그의 하얀 가운에는 더이상 피가 묻어나지 않는다. 메리와 껴안을 때, 그녀는 분명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 장면이 한 인간의 사랑이 한 사람을 구원해주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응답으로 인해 사랑으로 구원받은 남자를 상징하는 것에 더 가깝다면. 늘 구원에 대해 질문을 했던 이 남자가 결국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천국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하나의 길고도 진한 키스와도 같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이 결말을 더욱 납득할 수 있을까?
메리가 그날 밤 찾아와 함께 호흡을 나눈 것도, 그녀가 들어와 그를 안았던 것도 톨러의 상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이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신의 대답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