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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J

HBJ

7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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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

Movies ・ 2018

Avg 4.1

알폰소 쿠아론은 '아즈카반의 죄수'부터 시작하여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 같은 SF 수작들로 국제적 명성을 쌓은 감독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그는 자신의 고향 멕시코로 돌아와, '이투마마' 시절에 보여줬던 인간과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다시 선보이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알폰소 쿠아론은 영화라는 예술로 그가 사랑(AMOR)하는 공간(ROMA)을 재탄생시켰다. 이 영화의 배경은 60년대 말 멕시코 시티 내 로마 지역이다. 멕시코 현대사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나, 거센 학생 운동과 다가오는 70' 멕시코 월드컵 포스터 등으로 미루어보아, 88 올림픽 직전의 서울이 가장 와닿는 비교가 될 듯하다. 하지만 쿠아론은 이런 사회적 변동기에 많이 집중하진 않는다. 그가 본 그 시절의 멕시코 시티는, 사람들과 삶으로 가득차 있는, 영화 보러 가기도 하고, 근처 식당에서 친구들과 연애 상담도 하고, 집에선 아이들이 뛰다니며 웃고 싸우는 소리 뒤에 어른들의 근심어린 대화도 들리는 곳이다. 그는 멕시코 시티를 사람 사는 곳으로 보고, 그가 보는 그 도시를 스크린으로 최대한 옮기는데 노력을 다한다. 알폰소 쿠아론하면 떠오르는 키워드 중 하나는 롱테이크다. 오랜 친구이자 촬영 감독인 엠마누엘 루베스키와 함께 그는 '칠드런 오브 맨'의 차량 추격이나 마지막 클라이막스의 도심 전투 시퀀스부터 시작하여 '그래비티'에선 영화 전체를 황홀하면서도 극사실적인 효과가 강렬히 나타나는 롱테이크를 찍으며, 여러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다. 이번 영화도 그의 테이크들은 평균적으로 긴 편이긴 하나, 지난 영화들에 비해서는 짧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훨씬 간소화됐다. 이전 영화들에선 복잡한 동선으로 현란한 액션씬들을 선보인 반면, 이 영화에서는 팬과 측면 트래킹으로 동선을 굉장히 단순화했다. 심지어 그 움직임도 간소화했다. 팬을 할 땐 90도 이상을 도는 경우가 적고, 회전 속도도 느리고 일정하게 유지한다. 트래킹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거의 정중앙에 유지하며 등속도로 따라간다. 절제된 카메라워크와 딥포커스를 통해, 그는 캐릭터들이 살고 있는 멕시코 시티라는 도시와 그 도시 안에서도 그들이 사는 집의 공간적 정보를 느리고 자세하게 전달한다. 그가 보는 세상을 관객이 최대한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65 mm 필름으로 흑백 이미지를 담으며, 마치 감독의 머리 속에 있는 노스탤지어를 필름 영사기에 돌리는 듯한 선명한 빈티지함이 느껴졌다. 이 영화에 스토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 줄로 요약하면, 사람 사는 이야기, 딱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쿠아론은 이 일상물 속에서 인물들이 사는 생활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드라마들, 아이들의 소소한 다툼, 개똥 문제, 개똥 같은 연애 문제, 꼬이는 가정사 등을 통해 관객이 충분히 즐길만한 소재들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순차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그렇듯이, 제각각 독립적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의 임신을 예로 들면, 이 이야기를 하나의 플롯으로 보면, 영화는 이 플롯을 딱 5개의 씬으로 끝낸다. 하지만 이 중 2개의 씬은 주인공의 고용주이자 같이 사는 가족의 파경 플롯과도 엮인다. 이렇게 인생살이가 그렇듯이, 드라마는 순차적으로 거시적인 내러티브를 따르며 전개되지 않고, 자그마한 사건들이 이리저리 엮이며, 우발적으로 발생한다. 덕분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소소한 쫄깃함을 선사하기도 하며, 희로애락이 번번이 교차하며 주인공의 인생을 찾아오는 작고 아름다운 혼돈이 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인물들과 이야기들이 있음에도, 쿠아론은 오로지 주인공 클레오에만 집중한다. 카메라는 거의 그녀를 떠나지 않으며 그녀가 인식하는 세계에만 집중한다. 사운드도 오로지 클레오 중심으로 들리기 때문에 그녀가 듣는 도시의 사람 소리와 차 소리, 그리고 그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점점 작아지는 다른 인물들의 대화 소리 등으로 영화는 클레오를 중심으로 세상을 구축한다. 클레오라는 인물은 영화 속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펼치는 주인공이기도 하며, 이 영화의 드라마틱한 순간들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기도 하나, 그녀의 세상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매개체이기도 한 인물이다. 이런 단단한 중심이 있기에 쿠아론의 일상물은 순항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건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캐릭터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클레오가 자신의 기구한 인생사를 설명하며, 어쩌다가 멕시코 시티의 중산층 대가족 집으로 들어와 가정부를 하게 됐는지, 자신이 어떤 철학으로 인생을 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푸는 씬은 없다. 하지만, 쿠아론은 일상을 계속 살아가며, 순간순간의 스토리를 만들어 나아가는 인물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이들의 캐릭터들은 어떤 아이디어의 인간 형태가 아니라, 말도 많고 탈도 많으며 실수도 많이 저지르는,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과 정으로 넘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90년대생, 멕시코에서 세상 반바퀴 떨어져 있는 대한민국에서 자란 사람이다.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머리와 가슴에 없는 상태에서 이 영화는 나의 마음 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진 못했다. 쿠아론이 이 영화로 보여준 것은 보편적인 인간미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구체적인 장소와 구체적인 시대상의 생활이기도 하기 때문에, 감독이 원했을 법한 깊은 감상을 나는 못한 것 같다. 알폰소 쿠아론은 '로마'의 감독이기도 하지만, 각본가, 편집자, 촬영 감독, 제작자이기도 하다. 그에게 이 영화는 굉장히 소중하고 개인적이면서, 매 씬에서 그 시절의 기억에 대한 그의 사랑이 묻어나온다. 그가 본 '로마'는 장미빛 시절은 아니다. 멕시코 최고의 황금기도 아니고, 그의 인생 황금기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로마'는 사람 냄새가 향기롭게 나는 세상이다. 디스토피아적 미래관이나 우주 파편이 날라다니는 우주를 이어, 그는 그의 추억을 체험할 수 있는 영화를 하나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 정성들여 가공한 이미지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못 본다는 것이 이 영화 최대 결함일지도 모른다 (65 mm 낭비하지 말고 극장에 걸어라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