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병규 평론가

Come and Go
Avg 4.0
<오고 가며> 에 대한 칼럼 호아이오 세자르 몬테이로의 <오고 가며>는 죽음 앞에 당면한 노인의 소멸해가는 육신이 이제 갓 소생한 젊은 육신과의 처절한 대조, 융기하는 애로티즘과 침강하는 활력과 육체, 삶과 죽음의 영묘한 경계를 깨달은 노장의 늑장일 것이다. 데뷔작부터 고수해왔던 세자르 몬테이로의 관성자는 마치 일면적인 사회가 아닌 절대적인 필수불가결한, 인간이 규제할 수 없는 생사에 이단 정신을, 마치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처럼 그로테스크한 엽색 행각을 통해 표상하는 경지에 당도했는데, 그 전에선 보다 삶의 풍광과 죽음의 허물어진 구획이 능청스럽게만 또는 외벌적 허희장탄으로 웃으며 멀찌감치 '응시' '수렴'한 것에 그쳤다면 실재의 범위에서 죽음을 앞둔 노장의 자전적 고뇌가 담긴듯 '목도'와 영묘한 분위기, 그 전의 그가 구현한 에로스와 파토스적 관능미가 재전되었다. 비영거리며 적멸하면서도 마치 그의 정신이 검버섯이 피는 저약한 육신을 지탱하듯 <백설공주>보다 배가된 분량으로 삶을 회고하기 시작하는데, 조스켕 데 프레의 미사곡이 스크린을 서성거릴 때 그의 영화에 찬탄했던 이들, 죽음을 눈 앞에서 목도한 삶의 '영지(靈智)'가 개방된 이들이라면 절륜했던 그의 필름 깎기가 그리워지고 금새 노스텔지어를 경험하게 되는데, '노스페라투'를 비꼬며 그림 형제의 '백설공주'를 조롱하며 빅토르 에리세의 평가처럼 몬테이로 개인의 잣대를 여과없이 표출하던 영원한 우리의 이단아 몬테이루의 영화 순환기는 우리의 삶처럼 소멸에 이른 것이다. 이젠 숭고할 정도로, 감상주의적인 감회를 부르는 그의 비속하리만치 짝이 없는 성에 대한 분출되는 욕망는 죽음에 관한 객체적 저항일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 탐독했던 곰브로비치의 <포르노그라피아>가 번뇌에 감싸인 내 뇌에 재생된다. 2003년은 내게 가장 슬픈 해였다. 내 아버지가 뇌사하였고 1월 모리스 피알리가 작고했고 몬테이루가 그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영면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한다. 영화를 통해 유예된 죽음 아니 종잡을 수 없는 기약없는 죽음을 엿보았다.